"듣자마자 소름이"…죽음 이후 귀에 울릴 섬뜩한 목소리 [김수현의 THE클래식]
입력
수정
베르디, 기념비적 작품 '레퀴엠' 작곡
진노의 날, 죽음에 대한 공포 극대화
빠른 선율 진행·강렬한 악상…고도의 긴장감
'인간의 죄' 엄중한 경고…독자적 영역 구축
"진노의 날, 심판관이 오시는 날, 크나큰 공포가 오는 날, 모든 것을 엄히 다스리도다!" -베르디 <레퀴엠> 中 '진노의 날' 가사우리 사회에서는 입에 담기도 어려운 참혹한 사건들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 학생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학교폭력부터 최근 심각성이 대두된 디지털 성범죄, 스토킹에서 시작된 살인,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어쩌면 각종 흉악범죄는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의 삶에 더 깊숙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죄가 잇따르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아마 우리의 '법감정'일 겁니다. 피해자를 더욱 세심히 보호하고, 가해자에게는 더 엄격한 처벌이 내려지길 바라는 방향으로 우리의 정서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 살아온 모든 시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엄중한 메시지를 담아낸 베르디의 <레퀴엠> 中 '진노의 날(Dies Irae)'을 이 시점에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사회 구성원 누군가의 상처가 결코 우리의 안전과 무관치 않습니다. 한명의 악행이 수십개의 불행을 만들어내는 오늘, 작품이 이끌어내는 감정은 단순히 공포 수준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을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에 강렬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더해져 듣는 순간 청중의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음악, 베르디의 <레퀴엠> 中 '진노의 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진노의 날, '오페라의 거인' 베르디의 고통에서 피어나다
먼저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베르디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자체를 상징하는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3살 때부터 음악적 기량을 알아본 한 순회 악사로부터 음악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권유까지 받게 됩니다. 이후 7살이 되어서야 교육을 받게 된 베르디는 무서울 정도의 빠른 성장을 보입니다. 성 마카엘 성당의 오르간 주자 바이스트로키를 사사로 뒀던 그는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10살이 되던 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부친의 친구 바레찌의 후원으로 음악적 역량을 키워가던 베르디는 16세에 교향곡을 작곡할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죠. 이후 베르디는 3대 국민 오페라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셰익스피어 원작 오페라 '맥베스', '오텔로', '팔스타프' 등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세기의 걸작을 연이어 무대에 올리면서 정상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베르디의 작품을 배제하고는 서양음악사 중 오페라 영역을 제대로 논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오페라의 거인'으로 불리는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가져와 19세기 오페라의 수준을 최절정까지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구성에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대규모 합창과 군중 장면, 화려한 무대장치 등을 접목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요소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차별화된 예술 장르를 탄생시킵니다.베르디의 작품은 특유의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한 선율에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화성을 더하고, 대위법의 활용을 확대했습니다. 때문에 청중을 압도하는 표현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죠. 노년기가 되면서 섬세한 심리 묘사에 바그너의 기법까지 더해진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이렇게 보면 베르디가 오페라 영역에 한해서 기량을 갖췄던 작곡가로 비칠 수 있으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베르디 대표 종교음악 레퀴엠은 음악사에 기념비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죠. 라틴어 '안식'이라는 의미에 맞게 통상 차분하고 조용하게 연주되던 형식을 깨부수고, 120명의 합창과 100명의 오케스트라 규모를 구상해 전에 없던 웅장한 레퀴엠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존경하던 시인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된 베르디의 레퀴엠은 종교음악으로는 이례적으로 공연으로서의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규모가 크고 선율이 지나치게 화려하며, 극적인 악상 등의 요소가 종교음악의 경건함과는 맞지 않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의 경우 다른 레퀴엠과 달리 죽음에 대해 과도한 공포를 유발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숙명을 두고 깊게 고민해 온 베르디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아내와 두 자녀를 병으로 잃어야 했던 베르디의 내면세계가 그대로 표출된 셈입니다. 과거에 비판의 근거가 됐던 특성이 현재엔 베르디만의 음악적 가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안식을 달라는 이상적인 메시지를 넘어 보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냄으로써 높은 완성도를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섭리와 절박하고도 고통스러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살아 있는 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 베르디 <레퀴엠> 中 '진노의 날'. 모든 인간이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 그날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음악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몰아치는 음표와 폭발적인 표현력…숨 막힐 듯한 공포심 유발
'탕, 탕, 탕, 탕'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4분음표 연주로 시작합니다. 전체 악기가 동시에 가장 웅장한 크기의 포르티시모(ff)를 연주하면서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압박감을 선사합니다. 이후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등 목관 악기들이 아주 빠르게 16분음표를 몰아치면, 테너·베이스 성악 성부가 등장해 "진노의 날"을 아주 고통스럽게 울부짖듯 표현합니다. 이내 소프라노·알토 성악 성부까지 합세하면서 인간의 두려움을 더 극적으로 고조시킵니다. 이후 주선율이 셋잇단음표로 나뉘면 지속음과 뒤섞여 아주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는데, 이때 오케스트라가 트레몰로 기법까지 사용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의 극적인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이내 성악가들이 절규를 잠시 멈추면 현악기 전체가 16분음표로 아주 빠르게 하향하면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끌어냅니다. 팀파니가 엇박자로 내려치듯 연주하면서 절망스러운 감정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이 부분을 지나면 오케스트라와 성악 선율 전체가 두 번째 박자의 악센트를 넣으면서 자리에 있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압박감을 표현합니다. 잦은 악센트 기법이 등장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혼내는 듯한 느낌까지 전달합니다. 그러면 성악 선율 뒤로 오케스트라가 번갈아 상행하면서 누군가 급하게 쫓아오는 듯한 분위기가 맴돕니다. 아주 잠시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집니다. 이때 방심하지 말라는 듯 높은 음역의 현악기와 관악기가 순식간에 음표를 빠르게 상행합니다. 이내 모든 악기와 성악 선율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섬뜩한 감정을 최절정까지 끌고 올라가죠.이후 성악 선율은 아주 장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에 반해 오케스트라는 상행하는 선율을 연주합니다. 온 세상 사물들이 회오리치는듯한 혼란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면 잠시 괴로움을 내려놓는 듯 현악기와 일부 목관악기를 제외한 모든 악기가 연주를 멈춥니다. 베이스 성악 선율이 서서히 하행하고 남은 악기들이 반음계로 상행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듯한 양상이 두드러지면 "심판관이 오시는 날, 크나큰 공포가 오는 날. 모든 것을 엄히 다스리도다!"라는 가사를 전체 성악 선율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입니다. 이후 긴장한 맥박 소리를 나타내듯 현악기에서 짧은 꾸밈음이 등장하면 모든 악기의 소리가 점차 줄어들면서 한 부속가의 끝을 맺습니다. 인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빠져나가고 죽음이 드리우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첫 시작부터 강렬한 선율 진행과 오페라를 능가하는 극적인 악상,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대규모 구성까지 갖춰진 연주로 청중으로 하여금 이성적 판단을 잃게 만든다는 베르디의 <레퀴엠> 中 '진노의 날'. 뚜렷한 색채에서 나오는 장악력으로 죽음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공포심을 극대화해 세계에서 가장 불편한 클래식이라 불리기도 합니다.그러나 진짜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타인의 경멸만이 남는 일일 겁니다.가장 투명하게 빛나야 할 누군가의 삶을 짓밟은 그들에게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에서도 철저한 대가가 치러지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