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양식에 당황"…유지비만 연 5조원 드는 日관공서 시스템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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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흔들린다(6) 디지털 패전최근 일본 도쿄지사로 부임한 이용원씨(가명)는 전입신고를 위해 주오구 신토미초의 주오구청을 찾았다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주오구의 서류인데도 전화번호 기입 방식이 인감등록신청서는 국번을 '괄호' 안에, 인감등록증명서교부신청서는 '하이픈(-)' 사이에 적도록 돼 있었다.
日관공서 시스템은 왜 1718가지가 됐나
가로·세로쓰기, 전화번호·생년월일 입력 방식 제각각
'자치' 강조한 행정법 탓 지자체 시스템 다 달라
2001년 'e-재팬' 추진했지만 전자정부 세계 14위
디지털행정 실패가 '코로나 대응을 팩스로' 불러
디지털청 설립해 '디지털 패전' 만회 나섰지만
생년월일도 어떤 서류는 서력으로만, 또 다른 서류는 일본의 연호로 기입하도록 했다. 외국인들에게만 관공서의 서류 작성방식이 혼란스러운게 아니다. 일본인들도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전각과 반각(한자 표기법) 등 제각각인 서류양식 때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지자체 시스템 유지에만 연간 5조원
같은 주오구청의 서류들도 이처럼 다르니 지방자치단체 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일본 미디어들은 "일본 관공서의 문서 입력 방법은 1718가지"라고 자조한다. 1718개는 일본 기초자치단체의 수다.일본 행정법상 주민등록 등의 업무는 지자체의 고유권한이다. 지자체 관련 법령은 주민등록 등 관공서 문서의 종류와 항목만 규정하고 있다. 서류양식과 기입방식은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1960년 오사카시를 시작으로 지자체 업무에도 컴퓨터가 도입되자 1718개 지자체들은 저마다 다른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자체마다, 심지어 같은 지자체 내에서도 서류양식과 기입방법이 제각각인 이유다.지자체마다 고유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탓에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경신하는데만 매년 5000억엔(약 4조8635억원)이 들어간다. 1조엔 안팎인 일본 정부 디지털 예산의 절반이다. 중앙 부처의 시스템 유지관리비와 투자비로만 매년 7000억엔이 쓰인다.
지자체별로 다른 서류양식과 시스템은 주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시스템 유지비용에 막대한 예산이 사용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일본 행정의 디지털화를 가로막은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된다.
코로나19가 처음 확산했을 때 관련 부처들이 온라인 회의를 하지 못하고, 지자체와 보건소들이 감염 상황을 팩스로 집계한 것도 관공서 시스템이 저마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미국과 한국이 2주 만에 끝낸 코로나 지원금 지급을 일본은 6개월이 걸린 대응속도의 차이로 나타났다.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개혁 담당상은 "코로나19와의 싸움은 디지털 패전"이라고 말했다.1960년에 지자체 업무에 컴퓨터를 도입한 일본이 디지털화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일본 정부는 5년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국가를 건설한다는 'e-재팬' 전략을 내걸었다. 하지만 2020년 국제연합(UN) 전자정부 순위에서 일본은 14위로 처져 있다. 일본과 같은해 디지털화를 추진한 덴마크는 세계 1위, 1997년부터 디지털화에 나선 한국은 2위다.
일본경제연구센터(JCER)가 평가한 2020년 디지털잠재력지수에서도 일본은 66.3점으로 16위에 그쳤다. 1위 스웨덴(74.9점)과 5위 한국(70.8점)과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72세 노교수가 디지털행정 수장"
일본의 디지털화가 구호에 그친 가장 큰 원인으로 칸막이 행정이 지적된다. 디지털 업무가 종합전략과 마이넘버 카드(한국의 주민등록번호)는 내각관방, 지자체 디지털화는 총무성, 민간 부문 디지털화는 경제산업성으로 흩어져 있었다. 온라인 진료는 후생노동성, 원격교육은 문부과학성, 운전면허증은 경찰청 소관이었다. 미래 전략만 하더라도 인공지능(AI)은 문부과학성과 경제산업성, 사이버보안은 내각관방과 경제산업성 총무성이 제각각 추진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디지털 예산의 절반은 지자체마다 제각각인 시스템 보수·경신에 사용되는데 정부 부처마다 중복투자에 나서니 성과가 나올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노무라 아츠코 일본종합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한국은 정부부처를 넘나들며 디지털화를 진행하는 강력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지적했다.'디지털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작년 9월 총리 직속으로 디지털청을 설립했다. 흩어져 있는 디지털 업무를 한데 모아 일본의 디지털화를 총괄 지휘한다. 초대 장관에는 히라이 디지털개혁 담당상(사진 오른쪽), 사무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디지털감(監)에는 민간 출신인 이시쿠라 요코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72세·왼쪽)를 임명했다.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총리는 2020년 9월23일 디지털 개혁 관계 각료 회의에서 "디지털청은 부처간 칸막이 행정을 타파하고 대담한 규제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돌파구"라고 말했다.
디지털청은 우선 마이넘버 카드의 보급과 활용 범위를 넓히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지자체 행정시스템을 2025년까지 통합하는 작업도 한다.
하지만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디지털청의 성과를 기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코로나19 확산 2년간 일본 정부가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했지만 마이넘버 카드를 가진 일본인은 전체의 36%에 그쳤다. 1718개에 달하는 지자체 행정시스템을 통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IT 전문가도 적지 않다.한 일본 사립대학 교수는 "IT 환경이 익숙할 리 없는 72세의 노교수를 디지털청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데서 디지털청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