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의 슬픔..."우리가 꿈꾸는 직장은 없다"

[특별칼럼 : A대기업 홍보팀장]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속 대사가 인용된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주인공에게 영화 속 또 다른 인물이 수어로 말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하 생략)”영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건네는 이 문장은 “당신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으니 덤덤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로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꿈은 꿔도 되지만…'꿈의 직장은 없다'

직장인들의 삶도 이와 같다. 현재 처한 상황이 녹록하지 않지만 꿈에 그리는 완벽한 직장은 없으니 ‘그냥 살아가는 곳’ 또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장소’가 바로 회사다. 옮겨봐야 별수 없다는 점도 잘 안다.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꿈을 꾸기 마련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에 따라 판교로 상징되는 플랫폼·게임 등 IT기업들은 제조업 중심의 주요 대기업으로부터 인재를 수혈하기 시작했다. ‘원서만 내면 옮길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직이 수월해졌다. ‘이직감정’은 서로에게 전이됐다. 보통 10년 남짓의 경력을 쌓았던 20~30대의 젊은 직장인들이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움을 꿈꾸며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민 등 주요 플랫폼사를 일컫는 말)’로 대변되는 플랫폼사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옮겨 보니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 이세이미야케 터틀넥 스웨터에 뉴발란스 993 운동화를 신는다고 모두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없듯이, 판교에 간다고 그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연공서열과 위계질서가 있는 오래된 회사에서 그럭저럭 선배들의 눈치를 봐가며 생활했던 직장인들에게 ‘젊은 상사’의 보이지 않는 압박과 차별은 오히려 견뎌내기 힘들었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여긴 체계가 없어요”밖에서 바라보면 국내 ICT 분야를 대표하며 ‘대학생 선호기업’ 상위권에 위치하는 기업들도 이러한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반적인 대기업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개발자만 우대’하는 판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그래도 모험은 계속된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면접은 회사를 옮기기에 상대적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쑥하게 차려입고 남몰래 옮겨 갈 회사의 면접을 볼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뜻이 있다면, 재택근무 중 잠시 짬을 내 면접을 보면 되었다.물론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기업 경영지원실에 근무하는 한 친구는 “다국적기업이나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기업으로 옮겨 간 선후배들도 많은데, 밖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완벽한 삶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말한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에 어렵게 입사했다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창업의 길을 가거나 국내 대기업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글로벌기업 입사를 위해 화상 면접만 12번을 봤다는 동료도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현재 처우가 불만이거나 함께 일하는 동료와 갈등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요즘 직장인들’에게는‘모험’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이 서툴거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문화가 사회에 자리 잡은 까닭이다.

오늘날의 젊은 직장인들에게는 아득히 먼 옛날. 2008년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이직 시장에는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MBA를 마친 후 금의환향한 인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BCG같은 대형컨설팅회사로 가지 못하더라도 대기업 기획담당 임원으로 쉽게 자리를 잡았다. 마치 벨에포크 시대의 평화를 보는 듯했다. 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그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 옮긴 직장에서 그들이 행복했는지 아닌지 우리는 결말은 알지 못한다.

세월이 훌쩍 지난 국내 이직시장은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결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저 옆에 앉은 동료에게 말을 건넬 뿐이다.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