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사료] 분단후 첫 공식회담 3분만에 끝…"안녕하시냐"로 시작(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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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챙이 1년에 300~400여명 치료" vs "앉은뱅이도 세워"…체제경쟁 기싸움 치열
북 "남북 자유롭게 못 다닐 근거 없어" 이산가족 상봉·왕래에 적극적 남북이 분단 이후 대화의 문을 연 것은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이 처음이었다. 1945년 분단 이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마주 앉은 남북 대표단이 주고받은 첫마디는 무엇이었을까?
통일부가 4일 공개한 제1차 남북 적십자 파견원 접촉 자료에 따르면 당시 대한적십자사 파견원인 이창렬 서무부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 대표단에 "안녕하십니까"란 첫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양측은 자리에 앉으며 통성명을 하자마자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받아온 신임장을 서로 교환했다. 교환이 끝난 뒤 "수해가 많이 나지 않았느냐"는 우리 측의 질문에 북측은 "수해가 없었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이어 "아, 그러냐"는 반응에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봅니다"라며 첫 접촉을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북측은 자신들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라며 앞으로 이 명칭대로 정확히 써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측 역시 정식명칭이 대한적십자사라며 "간단하니 기억하기 좋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전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됐던 역사적인 첫 회담은 이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기 싸움 속에 약 3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회의록에 따르면 첫 공식 회담은 1971년 8월 20일 낮 12시 1분부터 4분까지 약 3분 동안 진행됐다. 첫 회담의 우리 측 파견원은 이창렬 부장과 윤여훈 섭외부 참사였고 북측은 서성철 문화선전부 부부장과 염종련 적십자회 지도원이었다.
이들은 엿새 뒤 같은 장소에서 진행한 2차 접촉 이후부터는 날씨 이야기, 자녀 이야기 등 신변잡기 성의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첫 접촉 당시의 팽팽한 긴장감은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자 체제 경쟁으로 또다른 긴장감이 조성된 정황도 드러났다.
1971년 9월 파견원 4차 접촉 당시 이창렬 부장은 북측에 "우리는 언챙이(언청이·구순구개열)를 1년에 300~400명 치료한다"며 "72년이면 우리 남한에 언챙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하자 북측 염종련 지도원은 "우리는 언챙이 수술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서게 한다"고 맞불을 놓았다.
파견원 접촉에 이어 시작된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당시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1971년 11월 3일 판문점에서 열린 예비회담 당시 북측 대표는 "서로 지척에 두고 있는 남북의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우들끼리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며 자유 왕래를 주장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남측의 반공체제를 약화하고 통일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남측은 이산가족 생사부터 확인하고 단계적인 상봉을 해야 한다며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간 첫 공식회담에서 첫 대화가 무엇이었는지가 주목되는 부분"이라면서 첫 회담 이후 지금까지 총 5번의 정상회담을 포함해 600여 회의 남북회담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북 "남북 자유롭게 못 다닐 근거 없어" 이산가족 상봉·왕래에 적극적 남북이 분단 이후 대화의 문을 연 것은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이 처음이었다. 1945년 분단 이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마주 앉은 남북 대표단이 주고받은 첫마디는 무엇이었을까?
통일부가 4일 공개한 제1차 남북 적십자 파견원 접촉 자료에 따르면 당시 대한적십자사 파견원인 이창렬 서무부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 대표단에 "안녕하십니까"란 첫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양측은 자리에 앉으며 통성명을 하자마자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받아온 신임장을 서로 교환했다. 교환이 끝난 뒤 "수해가 많이 나지 않았느냐"는 우리 측의 질문에 북측은 "수해가 없었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이어 "아, 그러냐"는 반응에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봅니다"라며 첫 접촉을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북측은 자신들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라며 앞으로 이 명칭대로 정확히 써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측 역시 정식명칭이 대한적십자사라며 "간단하니 기억하기 좋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전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됐던 역사적인 첫 회담은 이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기 싸움 속에 약 3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회의록에 따르면 첫 공식 회담은 1971년 8월 20일 낮 12시 1분부터 4분까지 약 3분 동안 진행됐다. 첫 회담의 우리 측 파견원은 이창렬 부장과 윤여훈 섭외부 참사였고 북측은 서성철 문화선전부 부부장과 염종련 적십자회 지도원이었다.
이들은 엿새 뒤 같은 장소에서 진행한 2차 접촉 이후부터는 날씨 이야기, 자녀 이야기 등 신변잡기 성의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첫 접촉 당시의 팽팽한 긴장감은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자 체제 경쟁으로 또다른 긴장감이 조성된 정황도 드러났다.
1971년 9월 파견원 4차 접촉 당시 이창렬 부장은 북측에 "우리는 언챙이(언청이·구순구개열)를 1년에 300~400명 치료한다"며 "72년이면 우리 남한에 언챙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하자 북측 염종련 지도원은 "우리는 언챙이 수술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서게 한다"고 맞불을 놓았다.
파견원 접촉에 이어 시작된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당시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1971년 11월 3일 판문점에서 열린 예비회담 당시 북측 대표는 "서로 지척에 두고 있는 남북의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우들끼리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며 자유 왕래를 주장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남측의 반공체제를 약화하고 통일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남측은 이산가족 생사부터 확인하고 단계적인 상봉을 해야 한다며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간 첫 공식회담에서 첫 대화가 무엇이었는지가 주목되는 부분"이라면서 첫 회담 이후 지금까지 총 5번의 정상회담을 포함해 600여 회의 남북회담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