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억엔 아끼려다 韓에 '반도체 왕좌' 내준 日

일본이 흔들린다
(7) 산업 몰락 부추긴 '뒷북 정책'

D램 3위 엘피다, 스마트폰 시대 직전
공적자금 끊겨 파산

정부 전폭적 지원으로 폭풍 성장한
SK하이닉스와 대조적

반도체 점유율 0% '고사 위기'
뒤늦게 해외기업들과 협력
사카모토 유키오 엘피다 사장이 2012년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제공
“1년만 더 기다려줬더라면 일본에도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살아남았을 텐데….”

사카모토 유키오 전 엘피다 사장은 지금도 2011년 말 공적자금 지원을 중단한 일본 정부의 결정을 안타까워한다. 2012년 2월 27일 세계 3위 D램 반도체업체이던 엘피다는 도쿄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듬해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엘피다를 인수하면서 일본의 D램 전문업체는 한 곳도 남지 않게 됐다.엘피다는 1999년 일본 NEC와 히타치제작소의 D램 사업부 통합으로 탄생했다. 한때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까지 올랐지만 2000년대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당시 하이닉스)와의 치킨게임에서 패하며 경쟁력을 잃었다.

日 정부도 “반도체 몰락은 정책 실패 탓”

엘피다가 2007년부터 2년 연속 2000억엔(약 1조9389억원) 넘는 적자를 내자 일본 정부와 채권단은 2009년 3년 만기로 1100억엔의 협조융자를 제공했다. 하지만 만기를 맞은 2011년 말 일본 정부와 채권단은 융자 연장을 거부했다.

2011년 말 엘피다의 부채가 자기자본의 1.3배인 2900억엔까지 불어나자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0년 말부터 D램 가격이 급락하고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엘피다는 5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공교롭게도 엘피다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2012년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 해였다. D램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일본 정부가 1년만 더 기다려줬더라면 반도체 시장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사카모토 전 사장이 한탄하는 이유다. 와카바야시 히데키 도쿄이과대 대학원 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보조금 문제로 1980년대 미·일 무역마찰의 빌미를 제공한 기억 때문에 일본 정부의 정책 지원은 계속해서 한 박자씩 늦었다”고 지적했다.

일본 언론들이 엘피다와 정반대 길을 걸은 사례로 주목하는 회사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오랜 D램 치킨게임 속에서도 한국 정부와 채권단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에 되살아났다. 2004년 엘피다와 비슷한 규모였던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17배 늘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정부도 ‘반도체 패전’의 원인을 한국과 대만이 국가적으로 반도체 기업을 육성한 데 반해 일본은 기업에 대한 지원을 줄인 데서 찾고 있다. 하기우다 고이치 경제산업상은 작년 말 의회에서 “세계 반도체산업의 조류를 읽지 못해 적절하고 충분한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고 자인했다.1988년 50.3%였던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019년 10.0%까지 내려앉았다. 경제산업성이 작년 6월 발표한 ‘반도체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은 ‘제로(0)’가 된다.

“5년 후 반도체 베테랑 인력 사라질 것”

일본 정부도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반도체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도체를 경제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전략 물자로 지정하고,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생산공장을 규슈 구마모토에 유치했다. 건설비의 절반가량인 4000억엔 이상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조건이다.

일본 정부가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유치했다’고 홍보하는 것과 달리 TSMC 구마모토 공장에서는 22~28나노미터(㎚·1㎚=10억분의 1m) 반도체를 주로 생산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칼럼니스트인 나카야마 아쓰시는 “20나노미터 기술은 10년 전 기술인 데다 TSMC에서 생산한 제품이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로 계산될 것도 아니다”고 꼬집었다.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은 최근 미국을 방문해 최첨단 2나노미터 반도체 공동 개발 추진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반도체 제조장비 및 소재 회사가 IBM 등 미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방식이어서 일본 반도체의 부활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일본 반도체산업이 쇠퇴하면서 전문 인력이 줄어든 것도 부활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총무성에 따르면 전자부품 디바이스·전자회로 제조업의 25~44세 종사자 수는 2010년 38만 명에서 2021년 24만 명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일본 전자정보기술산업회(JEITA)는 “5년 후면 반도체 베테랑 엔지니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