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마도주 항복 받긴 했지만 전투다운 전투 없이 철군, 미온적 대응으로 해양포기…훗날 임진왜란 참사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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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2
(95) 조선 전기의 왜구발호와 대마도 정벌 (下)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중간지역인 아소완 근처 니네(仁位)에 상륙했다. 하지만 급습당해 장수들을 비롯한 100여 명의 군사가 죽었다.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고, 양측은 타협을 시도했다. 조선의 입장으로는 해양작전이 곤란해지는 음력 7월 이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대마도주는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이종무는 정벌을 성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군했다. 불과 15일 동안의 작전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이뤄지지 않았고 전리품도 빈약한 대규모 해외 원정이었다. 만약 현장 사령관인 이종무가 조선을 겨누는 비수인 대마도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영토로 편입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15일 만에 철군 후 왜구들 다시 활개
결국 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도 해안을 공격했고, 조선은 재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화하고, 내부에서 반발이 있자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대마도가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한 영토니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대마도주는 왜인들이 거제도에 살게 하고,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형식을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을 벌고, 실리를 얻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산포(동래)’와 ‘내이포(진해)’ 등을 개설했고, 대마도를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영토로 취급했다. 도주에게는 ‘도선증명서’를 발급해 무역 독점권을 줬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되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주로 이때의 상황과 몇몇 기록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후에 세종은 일본국에 통신사를 세 번 파견하고, 염포를 설치하는 등 대마도에 유화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왜구는 근절되지 않았고, 때때로 침범을 일삼았다. 임진왜란 때는 선봉장으로 일본 군대의 향도 역할을 하면서 부산포에 상륙했다.그렇다면 조선은 해양 국방을 소홀히 한 것일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태조는 고려 말 대마도 정벌을 시도했던 박위를 책임자로 삼아 1393년 각 도에서 전함을 건조했다. 각 도에는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수군 절제사를 임명했다. 또 용산에 나가 신형 전함의 진수식을 참관했다. 태종도 전문적인 관청을 만들어 약 428척의 전함을 1408년 613척으로 늘렸다. 세종은 중국·일본·유구의 선박들을 연구한 뒤 장점을 취해 전선을 개량했다. 1420년에는 한강의 양화도에 행차해 신형 전함의 성능 시험을 참관했다. 1432년 조선의 전함은 무려 829척이었다. 1469년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각 도가 구비한 선박 숫자를 기록했고, 수군 숫자를 4만8800명으로 규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선 8도에 배치된 수군 병력이 4만9317명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해군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