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한 남자를 향한 절절한 사랑 고백
입력
수정
지면S14
(51) 슈테판 츠바이크 《 낯선 여인의 편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두툼한 편지를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유명 소설가 R은 마흔한 살의 남자로, 경제력과 준수한 외모를 갖추고 있다. 여행을 즐기며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주 집으로 초대하는, 즐거운 삶을 누리는 중이다. R에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연이 담긴 편지가 도착하는데 그 편지가 소설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모파상, 체호프, 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단편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딱 100년 전에 쓴 《낯선 여인의 편지》는 지금도 토론 주제에 종종 오른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소설가 R에게 몰두한 여인,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남자 R, 이 두 사람의 사랑 방식을 읽은 독자들은 작가의 보수적인 여성관을 비판하기도 한다. 지고지순한 여인의 사랑법을 놓고 ‘주체적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나뉘는 경우도 있다. 두툼한 편지를 보낸 여인은 대체 어떤 사랑을 했던 것일까.
열세 살부터 그를 훔쳐 보다
인기 작가 R은 주소도 이름도 없이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로 시작하는 편지에 호기심이 발동해 읽기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서두에서 사흘 밤낮 간호했지만 아이가 독감으로 사망했고, 귀엽고 가련한 남자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아이의 아빠는 누구일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소설가 R임을 알았을 것이다. 소설 뒷부분에 여자는 아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지만, 그때까지 아이를 낳은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소설 전체가 독백 같은 편지문으로 이어지는 만큼 여자의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중편소설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읽다 보면 너무도 절절한 여자의 사랑과 무심한 남자의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여자는 열세 살 때 옆집으로 이사 온 스물다섯 살의 잘생긴 남자를 처음 봤다. 첫눈에 반한 소녀는 숨어서 그를 지켜보는 게 일과였다. 아주 잠깐 대면한 이후 그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그러다 엄마의 재혼으로 열여섯 살에 빈을 떠나 인스브르크로 이사갔다. 한시도 옆집 소설가를 잊은 적 없는 소녀는 그의 책을 모조리 사서 열심히 읽고, 신문에서 그의 소식을 샅샅이 찾아봤다.
열여덟 살이 된 여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빈으로 돌아와 옷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날부터 여자는 퇴근만 하면 소설가의 집 앞에 서서 그의 동향을 살폈다. 그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골목길에 서 있던 여자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집에 들어가는 걸 보며 질투를 눌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을 했고, 사흘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날, 소설가는 곧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며 꼭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편지는 오지 않았지만 너무도 사랑한 그의 분신을 갖게 된 것에 만족했다. 아이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많은 남자가 사랑을 고백했지만 다 물리쳤다. 백작의 아내가 되어 귀족으로 살 수 있는 길도 마다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소설가 R과 아들뿐이었다.그녀는 이후 두 차례 소설가와 만났고, 그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그럼에도 멀리서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이 닥쳐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답답하기도, 이해되기도
절절한 마음이 가득 담긴 그녀의 편지를 읽으면 ‘왜 남자한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거야’라고 답답해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으로 인해 그가 조금의 부담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여자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그녀도, 아이의 존재도 몰랐던 남자는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츠바이크가 사춘기였을 때, 남자들은 자유로운 연애를 하면서도 순결한 여성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유럽문화사이자 자신의 자전적 회고록인 《어제의 세계》에 고스란히 기록했다.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남성과 여성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연애하기도 하고, 끝까지 순수함을 유지하기도 한다.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으며 만남에 대해, 상대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