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성 낮아" → "배제할 수 없어"…'빅스텝' 카드 꺼낸 이창용 [조미현의 외환·금융 워치]

기준금리 한번에 0.5%p 인상 가능성 열어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6일 "향후 빅스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국도 미국처럼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이 총재가 한국의 빅스텝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조찬 회동을 가진 뒤 "4월 상황까지 봤을 때는 그런 고려(빅스텝)를 할 필요 없는 상황이지만, 앞으로 물가가 얼마나 올라갈지 종합적으로 데이터를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이 총재는 당초 한국이 빅스텝을 할 필요성은 낮다는 입장이었다. 지난달 17일 이 총재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에서 "한국은 한 번에 0.25%포인트를 넘게 큰 폭으로 기준금리를 조정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며 한국의 빅스텝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한국은 지난해 8월부터 선제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는 이유에서다. 한은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달까지 4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0.5%에서 연 1.5%로 올렸다.

이 총재는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이 기준금리를 75bp(0.75%포인트) 올리지는 않겠다고 못 박았다"며 "한국은 (빅스텝을 배제하기에) 데이터가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물가 상승과 성장률이 어떻게 변할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며 "5월 금융통화위원회 상황을 보고 7, 8월 경제 상황과 물가 변화 등을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재가 한국의 빅스텝 카드를 꺼낸 것은 인플레이션 상황이 심각한데다 외환시장까지 요동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3월 10년 만에 4%를 넘어선 데 이어 지난달에는 4.8%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미국의 공격적인 긴축과 중국발(發) 봉쇄 쇼크 등으로 금융위기 수준인 1300원대를 위협하고 있다.이 총재는 그러나 한국과 미국 간 기준금리 역전에 대해서는 여전히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이 총재는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8%로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기준금리를 적어도 두 차례 이상 50bp(0.05%포인트) 올릴 것이란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며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크게 다르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한국은 물가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미국 정도는 아니다"며 "반드시 미국과의 금리차만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하는 것보다 성장과 물가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미 간 금리 격차가 생기면 여러 가지 대체할 상황들에 적응하는 게 낫지, 금리차를 막는 방향으로 정책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이 총재의 이런 발언이 알려진 뒤 원·달러 환율은 서울 외환시장에서 전 거래일보다 7원20전 내린 1277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기준금리 인상은 원화 가치 올려 원·달러 환율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이 총재는 그러나 기준금리 5월 추가 인상에 대해서는 "아직 금통위원들과 상의 전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이 총재는 이날 추 부총리와 취임 후 처음으로 조찬 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은 회동에서 "최근 금융·외환시장의 변동성이 고조된 가운데 물가 상승 압력이 크게 확대되고, 성장 둔화 가능성도 함께 커졌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은은 전했다.추 부총리는 "현재 경제 상황이 엄중하고 정책 수단은 상당히 제약돼 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중앙은행과 정부가 경제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인식을 공유하고, 정말 좋은 정책 조합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최근 경제는 정부 부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책 공조를 해야 그나마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부총리와 한은 총재가 만나는 게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한다는 부총리 말씀에 공감한다"고 화답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