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尹정부에도 포퓰리즘 씨앗 있다

"프리드먼의 자유 외쳤지만
세금 붓는 현금 공약 적잖아
포퓰리즘 버리지 못하면 실패"

박준동 부국장 겸 정책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취임식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친 것은 일관성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지난해 3월 검찰총장을 관두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고, 지난해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도 무너진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겠다고 했다. 누가 물어봐도 인생의 책으로 항상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는다. 오늘은 이 말 했다가 내일은 저 말 하는 많은 정치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드먼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뒤를 잇는 자유주의 학자다. 프리드먼에게 더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이는 하이에크다.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책 《노예의 길》 출간 50주년 기념판 서문(1994년)에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가 어떻게 더 파고들었는지 미스터리를 푼 위대한 저술”이라고 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저서 《선택할 자유》에선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부터 유래한 큰 정부, 규제 자본주의가 얼마나 허구이고 폐해를 가져다주는지 조목조목 짚었다.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이긴 것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부동산 실정(失政)에 대한 심판이었고, 공정을 빙자한 내로남불에 대한 경종이었다. 경제학자들, 특히 정통 경제학자들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후보의 기본소득 주장을 무산시켰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포퓰리즘의 결정판이다. 모든 국민에게 매달 또는 일정 기간마다 돈을 나눠주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기본소득은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무모한 주장이다. 공공정책 실험은 통제 집단과 실험 집단을 나누고 실험 집단에만 통제 변수를 가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전 국민 기본소득은 이렇게 집단을 나눌 수조차 없다. 인위적으로 인구 1만 명을 대상으로 실험 집단을 꾸민다고 해도 다른 변수를 제어할 수 없으니 실험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핀란드가 2017~2018년 2000명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경제학계에선 유사 실험 정도로만 보고 있다. 실제 핀란드 정부는 실험 집단을 실업자로만 구성해 노동시장 참여도 영향에 대해 일반적 결론을 낼 수 없다고 실토했다.

프리드먼이 꺼낸 ‘네거티브 소득세’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조금을 받고 소득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내는 것이 골자다.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회보장제도를 단순화하자는 것이 골자다. 큰 정부를 줄이자는 제안의 연장선상이었다.윤 대통령은 프리드먼을 인용했지만 정부 역할을 줄이고 포퓰리즘을 완벽하게 배격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최악의 주장인 기본소득은 막았지만 크고 작은 포퓰리즘 정책이 윤 정부에서 추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3대 현금 공약이다. 노인 기초연금을 월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것, 부모 급여(출산장려금)를 월 100만원으로 상향하겠다는 것, 병장 월급을 200만원까지 높이겠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만 5년간 68조원에 이른다. 이를 포함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윤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를 펼쳐가는 데 5년간 209조원이 든다고 했다.

소상공인에게 최대 1000만원을 지급하는 정책은 일회성이기에 포퓰리즘으로만 보기엔 무리지만 시기가 문제다.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년 전이나 1년 전에 지급했어야 할 지원금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당히 풀린 지금 지급한다니 어색하다.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말 외에 다른 해석을 내리기 힘들다.

이런 정책은 아마 윤 대통령 주위에서 아이디어를 냈을 공산이 크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프리드먼이나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자유를 외쳤으면 포퓰리즘을 버려야 한다. 과정의 공정에 주목해야지 결과의 공정에 주목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