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년 만에 처음인데…곳곳에서 무시당하는 러시아 국가부도 [정인설의 워싱턴나우]
입력
수정
채권자가 돈 안받겠다는 희한한 러시아 디폴트 총정리
WSJ "이르면 7월9일 디폴트 현실화"

여느 디폴트(채무불이행)와는 사뭇 다른 상황입니다. 러시아의 디폴트의 현주소입니다. 그렇다고 디폴트하면 따라오는 금융시장 쇼크나 대혼란 같은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알쏭달쏭한 러시아 디폴트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인설의 워싱턴나우'는 유튜브 영상과 온라인 기사 등으로 알짜 정보를 전해주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을 통해 찾아뵙고 있습니다.
1. 왜 디폴트가 되나

하지만 러시아는 다릅니다. 돈을 갚을테니 받으라고 하지만 채권자들이 받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 밖에 있는 외화 자산이 동결됐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대(對) 러시아 제재 중 하나로 러시아의 외화 자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러시아의 전체 외화 자산 6400억달러(약 809조원) 중 해외에 있는 절반가량의 달러 자산이 묶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미국은 5월 25일(현지시간)까지 한시적으로 채권 원리금 상환용에 한해 외화 자산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러시아와의 거래를 열어줬습니다. 미국은 25일 0시부로 이 유예조치를 종료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디폴트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러시아를 부도자로 낙인시키는 강제 디폴트입니다. 채무자 스스로 디폴트를 선언한 그리스나 헝다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2. 디폴트인가 모라토리엄인가
러시아가 달러나 유로 채권을 발행할 때 원리금을 달러나 유로로 갚는다는 계약을 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외화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와 금융거래를 금지한 서방 세계의 대 러시아 제재 때문입니다.
물론 러시아는 원리금을 루블화로 갚겠다고 하지만 어찌됐든 형식상 계약위반이어서 디폴트입니다. 러시아 디폴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105년 만에 처음입니다.
1998년 러시아의 국가부도는 디폴트가 아니라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에 가깝습니다. 채무를 못갚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은 갚기 어려우니 기한을 늦춰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엔 달러화 표시 채권이 아니라 루블화 표시 채권이었습니다.
3. 러시아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한 JP모건체이스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는 다음달 23일 달러화 채권 중 일부에 대해 약 2억3500만 달러의 상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음달인 6월24일까지는 1억5900만 달러의 추가 상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를 갚지 못할 경우 6월23일부터 30일간 유예기간을 갖고, 6월24일부터 15일간 유예기간을 갖게 됩니다. 이르면 오는 7월9일부터 채권단이 계좌로 돈을 받지 못하면 러시아가 최종적으로 디폴트 처리됩니다.
4. 러시아 채권 투자자는 어떻게 되나
물론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미국 제재를 피해 돈을 받는 방법입니다. 화폐와 결제망, 거래 은행을 모두 미국 제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그래도 미국 정부는 금융사들을 안심시키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러시아 외화 자산을 동결시켜놨기 때문에 비상 상황일 때 그걸 쓸 수 있습니다. 최대 4000억달러로 알려져 있는 러시아의 외화 자산이 담보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걸 함부로 가져다 쓰면 나중에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제재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는 형태로 흘러갈 확률이 높습니다.
5. 금융시장 쇼크는 없나
실례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1998년엔 시끄러웠습니다. 당시 미국의 헤지펀드였던 LTCM은 러시아 국채에 투자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보고 결국 파산했습니다. 당시 다우 지수는 전고점 대비 24% 급락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이미 우크라이나 침공과 국제 사회의 제재로 러시아 리스크가 선반영됐다는 게 첫째 이유입니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러시아의 채권등급을 사실상 디폴트 등급으로 강등시켜놨죠.
셋째 국제 사회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러시아 해외 자산이라는 담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상황입니다. 그 때까지 러시아 채권보유자나 러시아 관련 상품에 돈을 넣은 투자자들도 돈이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한 25억달러 상당의 신용부도스왑(CDS)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이건 급등한 CDS 금리에 반영돼 있다고 한다면 러시아 디폴트보다는 세계 식량 위기나 에너지 위기를 더 걱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