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결의안에 반대표”…ESG 속도 조절 나선 블랙록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이 투자 포트폴리오에 담은 업체들의 주주총회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안건에 반대표를 내기로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ESG 경영에 소홀한 업체엔 주주총회에 반대표를 행사하거나 주주개입 활동을 벌이겠다”고 했던 블랙록의 투자 기조가 바뀐 것일까
[한경ESG] ESG NOW
래리 핑크 블랙록 CEO. /사진=AP
지난 5월 15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블랙록은 같은 달 투자 스튜어드십(수탁자 책임원칙) 보고서에서 “향후 주주총회에서 기후 관련 안건 대부분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블랙록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주주총회에 안건으로 올라오는 정책 상당수가 경영진을 구속할뿐더러 지나치게 규범적”이라고 지적했다.이 같은 입장 표명은 블랙록의 그간 행보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블랙록은 기후변화 문제를 방치하면 이사진도 갈아치울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투자 기업을 압박하면서 전 세계에 ESG 경영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다. “블랙록의 투자 기조가 전 세계 기업의 ESG 경영 도입 속도를 결정짓는다”는 말이 투자업계에서 통용됐을 정도다.

블랙록 “ESG 경영은 장기적 수익 확보 목적”

블랙록이 이전과 다른 입장을 낸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 회사가 ESG 경영을 유도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방식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척도는 블랙록이 매년 1월에 내놓는 연례 서한이다. ‘ESG 경영의 아버지’라 불리는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가 투자 기업에 보내는 이 편지엔 10조100억 달러(지난해 4분기 기준)의 자금을 굴리는 이 자산운용사의 투자 신념이 담겨 있다. 이 서한이 연례 주주총회에 앞서 대주주인 블랙록이 경영진에 던지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특히 2020년 연례 서한은 파급력이 컸다. 핑크 CEO가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기업에 ESG 경영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기후변화가 회사의 장기 전망을 결정짓는 요소가 됐다”며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을 재편해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통합한 투자 포트폴리오야말로 투자자에게 더 나은 위험 조정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블랙록의 ESG 행보는 핑크 CEO의 편지 한 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회사는 2020년 ‘기후 행동100+’라는 이름의 투자자 네트워크에 가입했다. 이 네트워크는 지구 연평균 온도를 산업화 이전(1850~1900년)보다 1.5℃ 높은 수준으로 제한하자는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형 기관투자자들이 출범시킨 단체다. 지난해 3월엔 뱅가드 등과 함께 ‘넷제로(탄소배출 제로) 자산운용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다.
올해 연례 서한에서도 블랙록의 친ESG 기조는 계속됐다. 핑크 CEO는 이번 연례 서한 제목을 ‘자본주의의 힘(The Power of Capitalism)’으로 뽑았다. 내용도 경영의 중심을 주주가치 극대화에 두는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채웠다. 그는 “주주자본주의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인 논의가 아니라 장기적 수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자본주의란 경영진이 근로자, 소비자, 공급자, 그리고 회사가 번영하기 위해 의지하는 공동체와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달성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수익 창출에 ESG 경영이 부합한다는 그의 소신을 강조한 것이다. 지난해 블랙록이 투자업체의 주주총회에서 환경·사회 관련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비율은 46%(184건 중 84건)였다.

“ESG 명분으로 마이크로매니징은 반대”

지난 5월 블랙록이 기후변화 관련 안건 대부분에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밝힌 배경에도 주주자본주의가 깔려 있다. 블랙록은 “회사를 지나치게 꼼꼼히 관리하려(micromanage) 하거나 주주가치를 증진시키지 않는 제안”을 반대표 행사 대상으로 명시했다. 어디까지나 ESG 경영은 주주의 이익을 늘리기 위한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ESG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대외 환경 변화도 블랙록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공급난이 가중되면서 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랙록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넷제로’로의 전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며 “화석연료 생산업체는 러시아산 에너지를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화석연료) 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 핑크 CEO의 ‘ESG 드라이브’에 반감을 드러내는 정계 목소리가 커진 것도 부담이 됐다. CNBC에 따르면, 지난 5월 24일 테드 크루즈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핑크와 같은 자산운용가들이 정치적 이해에 부합하기 위해 다른 투자자를 대신해 표를 던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막대한 ESG 압력으로 기름값을 높인 핑크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지난 5월 10일 마이크 펜스 미국 전 부통령도 “직원 연기금을 ESG 펀드 투자에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고 블랙록이 ESG 투자 노선을 갈아탄 것은 아니다. 블랙록은 스튜어드십 보고서에서 “기업에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단·중·장기별 과학적 목표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이라며 “각 기업은 이러한 목표 설정이 장기적 차원에서 주주들의 경제적 이익에 어떻게 부합하는지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블랙록은 지난 5월에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향후 투자의 50% 이상을 지속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다”는 방침을 거듭 밝혔다. 숨 고르기는 하겠지만, ESG 경영을 강조하는 투자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주현 한국경제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