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명작 만든다?…"행복한 20대의 미학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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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예지 작가, 한경갤러리 전시‘불행과 결핍이 명작을 만든다.’
"화가 결핍, 작품 깊이 더한다"
통념 깬 '컴포지션' 전시
다채로운 색·질감의 추상화
"작품 속 숨은 의미 해석 대신
색채 등 그림 자체를 즐겼으면"
미술 역사엔 이런 통념이 있었다. 비슷한 수준의 작품이라면 힘든 삶을 살아온 작가의 그림이 더 비싸다. 천재 화가의 대명사 빈센트 반 고흐만 봐도 그렇다. 고통스러운 삶과 비극적 최후가 그의 탁월한 천재성에 후광을 비췄다.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는 추상화는 더하다. 수십 년간 무명 생활을 한 노(老)화가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젊은 작가의 작품은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이런 기준이라면 ‘요즘 작가’ 대부분은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미대 수업에 드는 재료값과 입시미술 전문 학원비 등의 비용을 생각하면 최소 중산층 이상의 ‘넉넉한 집안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때문이다.
양예지 작가(26)도 ‘요즘 작가’ 중 한 명이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2019년 시카고대 미대를 졸업했고,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남짓 됐다. 50~60대는 돼야 ‘허리 세대’ 취급을 받는 미술계에서는 일천한 경력. 하지만 그는 자신있게 말한다.
“삶의 질곡과 고통에서 우러난 작품이 감동을 주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삶이 불행하다고 무조건 작품이 좋은 건 아니잖아요. 젊고 행복한 화가도 얼마든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양 작가의 작품 25점을 소개하는 초대전 ‘Compositions’가 30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개막한다. 그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문화역서울284의 ‘대한민국 청년미술대전’과 서진아트스페이스의 ‘신진 작가 공모전’ 등 여러 곳에서 상을 받은 유망주다. 양 작가가 소속된 금산갤러리의 황달성 대표는 “시카고대 미대 교수들이 주목할 만한 제자라며 양 작가를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양 작가는 유화 물감과 아크릴 물감, 수채화 물감을 섞어 다채로운 색과 질감의 추상화를 그린다. 작품 주제는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 하지만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색채와 구성 등 심미성을 즐겨달라는 게 그의 당부다.
“그림을 보며 화가의 의도를 추측해보는 건 좋은 감상법이지만 ‘정답 맞히기’에 집착하면 금세 피곤해지고 그림 보기가 부담스러워집니다. 제 그림은 편안하게 그 자체로 즐겨주셨으면 합니다.”양 작가가 섣부른 작품 해석을 경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각자 그린 작품을 가져와 서로 비평하는 수업을 들었어요. 수강생 한 명이 작품을 가져왔는데 누가 봐도 하루 만에 대충 그린 그림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유행하는 주제였던 동성애에 관한 작품이라며 청산유수로 말을 하더니 최고점을 받아 가더군요. 이런 건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나이가 어리고 큰 어려움 없이 자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포장 없이 색이나 구성 등 그림 자체의 매력으로 승부하고 싶어요.”
전시작 중 ‘Mid-frustration’은 유일하게 명확한 스토리가 담긴 그림이다. 양 작가는 2020년 이 작품을 그리다가 슬럼프에 빠졌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코딩 학원에 등록해 지난해 상반기 내내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림과 달리 코딩에는 명확한 논리가 있다는 점이 좋았고 생각보다 적성에도 잘 맞았다”며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커졌고, 앞으로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김허경 미술평론가는 “양 작가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인 색감이 돋보인다”며 “색들이 서로 스며들고 부딪치기를 반복하며 작가의 마음 풍경을 세련되게 표현해냈다”고 평가했다. 전시는 다음달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