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 건설하려 했지만…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선언·정강이 새로운 문제 낳아

(98) 조선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6가지 이유
조선시대의 전형적 지방교육기관인 파주 향교 전경.
1592년 음력 4월 13일 황혼이 깃들 무렵, 700척에 탄 일본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명분을 내걸고 20여만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4일째 아침나절에야 상륙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그사이 도망간 정부와 군대 대신 의병들이 전국에서 항전했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를 이뤘다. 이어 정유재란을 거쳐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었고, 일본이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한다는 정보들이 유구국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심지어 간첩으로 활동했고, 훗날 향도 역할을 한 승려 겐소는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기이하고 무능한 정부는 갑론을박 끝에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일본에 파견해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공격 가능성을 놓고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두 사람의 의견은 정반대였다.불가사의 한 일이다. 존재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는 정부와 군대, 관리, 지식인 그리고 백성들이었다. 왜 조선은 국방을 무시해 생존을 위협받았을까? 조선과 국민은 어째서 항상 가난했을까?

조선 사회 붕괴에는 현실적인 상황 변화도 작용했지만, 국체와 정체 등의 근본적 성격이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헌법의 전문과 1조 1, 2항에 국체, 정체를 선언했다. 조선의 정체성은 주도 세력인 정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 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국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人君)을 버린다’고 적어 ‘백성의 중시’를 정체의 핵심으로 선언했다. 또한 왕권마저 제약하는 정치 엘리트들로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주장을 계승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조선은 끝까지 성리학의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추구하고, 신권이 강한 체제를 고수했다. 하지만 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선언과 이상적인 정책, 정강들은 국내외 상황 변화와 주체자들의 교체에 따라 빠르게 변질했다.
우계 성혼 묘소
첫째, 성리학자들은 절대적인 권력집단으로 변신했다. 과거를 통과의례로 삼은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학자이며, 이를 실현하는 관료다.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자 재화인 토지의 소유자들이며, 극소수의 공·상업 운영자들인 양반이었다. 또한 불교를 대체한 유교를 관리했고, 시(詩)·서(書)·화(畵)를 창작하는 문화인이었으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는 왕권조차 제약하고 사적인 법 집행도 할 수 있는, 막강한 사회권력을 소유한 절대적인 존재였다.둘째, 신분제가 고착화되고 차별정책이 철저해졌다. 혈통을 중심으로 양반·중인·상민·천민의 네 단계로 구분되고, 신분 간에는 이동과 전환이 불가능한 체제로 굳어졌다. 역관, 승려, 내시, 평민, 하급 군인 등도 출세가 가능했던 고려보다 오히려 퇴행했다. 또한 신분을 사(士)·농(農)·공(工)·상(商)·어업 등 직업과 연결해 경제적 차별까지 제도화했다. 선비는 정통론과 명분론으로 장자 상속제와 적서 차별, 남녀 차별 등의 사회 체제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이를 왕권과 겨루는 권력쟁탈전에도 악용했다. 결국 조선은 양반을 정점에 둔 견고한 서열사회, 계급사회로 전환됐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선의 정체성은 주도 세력인 전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조선경국전》에 국가의 목표와 정책의 대강, 방법론 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국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人君)을 버린다'고 적어 '백성의 중시'를 정체의 핵심으로 선언했다. 또한 왕권까지 제약하는 정치 엘리트들로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