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은 내 교과서"…'만인의 오빠' 송해 천상의 무대로

코로나 직전까지 팔도강산 누벼…카메라 불만 켜지면 펄펄 '작두장군'
평생 고향 그리워한 실향민…방송진행 역사 산증인
원조 국민 MC, 영원한 현역, 만인의 오빠, 일요일의 남자.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상징인 MC인 송해(본명 송복희·95)가 8일 영면에 들었다.황해도 재령군 출신인 송해는 한국전쟁 때 실향민이 됐다.

남쪽으로 내려온 송해는 해주예술전문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공연 진행도 겸하면서 남다른 입담을 발휘한 게 평생 직업으로 이어졌다.이후 방송까지 진출한 송해는 1988년 5월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았다.

오프닝 멘트에서 그가 "전국∼"을 외치면, 관중들이 "노래자랑∼"으로 화답하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국민의 눈과 귀에 생생하게 남았다.

전국 팔도를 구석구석 누비면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누구한테나 '오빠'로 불린 송해는 '현역 최고령 연예인'임에도 호칭에 걸맞게 정정한 모습을 보여줬다.송해는 후배 연예인들이 술자리를 함께하는 걸 꺼릴 정도로 '원조 주당'으로도 유명했다.

10여 년 전부터는 기력이 떨어지면 방송에 지장이 있을까 봐 술을 많이 줄였지만 "그것도 안 먹으면 인생이 적막하다"며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고령으로 방송이 힘에 부칠 만도 했지만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지켰다.1988년 5월부터 1994년 4월까지 7개월간 잠시 하차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35년간 매주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났다.

말 그대로 '일요일의 남자'였다.

지난해 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는 '전국노래자랑' 후임 MC를 누구에게 맡기겠냐는 질문에 "아직도 이렇게 또렷또렷한데 누굴 줘"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피로 누적과 체력 약화를 이유로 2010년 이후 방송 녹화에 몇 차례 불참했고, 대중도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오를 때마다 혹시 부고 소식일까 가슴을 졸였다.

2016년에는 사망설이 퍼져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했다가 유포자를 용서한 일도 있다.

올해도 두 차례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작곡가 이호섭과 임수민 아나운서가 MC를 대신 맡아 걱정을 사기도 했다.

기력이 떨어져 힘들어하다가도 카메라 불만 켜지면 작두를 타는 무당처럼 기운이 펄펄 솟아나는 것 같다며 방송가에서는 '작두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지역 갈등, 고부 갈등, 직업 간 갈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 성별과 세대 간 갈등이 '전국노래자랑'에서는 해소된다.

이 프로그램은 '내 인생의 교과서'"라고 방송에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송해는 전국 어떠한 돌발상황에도 완벽하게 대처하는 관록을 바탕으로 '영원한 현역'으로 불리며 방송 진행 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했다.
그런 송해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안고 살았다.

1998년 금강산 관광단으로 고향 땅을 밟았을 때는 아이처럼 좋아했고, 2003년 '전국노래자랑' 평양 편에서는 모란봉공원 평화정 앞 무대에 올라 '한 많은 대동강'을 부르며 "다시 만납시다"라고 안타까운 작별인사를 전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도 겪었다.

하나 있던 아들을 1994년 교통사고로 잃었고, 2018년에는 부인 석옥이 씨를 먼저 보내면서 큰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다.

송해는 부인 고향인 대구 달성군에 부부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곤 했던 것으로 전한다.

송해는 자신을 수식하는 수많은 말 중에 '오빠'가 가장 좋다고 했다.

"양평에 갔을 때는 105세 된 누님도 나한테 오빠라고 했어. 나처럼 동생 많은 사람이 없다니까.오빠라고만 하면 그저 좋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