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바다 넘겨야 하는 파3홀…자연 앞에서 골퍼는 겸손해진다
입력
수정
지면A32
대한민국 시그니처 홀 (1)대한민국에는 540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골프장에는 오너와 설계자가 가장 공을 들인 ‘얼굴’과 같은 홀이 있습니다. 적게는 18홀, 많게는 81홀 가운데 가장 멋진 딱 한 홀, 바로 ‘시그니처 홀’입니다. 그 골프장의 수준을 보여주는 홀이죠. 한국경제신문이 이런 홀들을 찾아갑니다. 한경과 함께 명품 골프장의 명품 홀을 여행해보시죠.
사우스케이프 스파&스위트 16번홀
美 골프다이제스트 "세계 최고 경관"
화이트 티 153m·레이디 티 138m
바닷바람 강해 두 클럽 길게 잡아야
韓 최고 '시그니처 홀' 만들기 위해
수백억 들여 전체 코스 재설계
"죽어서 이름 대신 골프장 남기겠다"
타임·마인 거느렸던 '패션맨' 정재봉 회장
2012년 현대百에 회사 판 돈 4000억 '올인'
꾸준한 투자로 '세계 9위 명품코스' 일궈
앞뒤 팀간격 10분…주말 그린피 45만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냥 놀랐다는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수천, 수만 명과 함께 봐야 할 ‘백만불짜리 절경’을 딱 5명(동반자와 캐디 포함)이 10분 동안(티오프 간격) ‘전세’를 내도 되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앞에는 마치 ‘애플 로고’처럼 땅의 왼편을 바다에 내준 파3홀이, 시선을 저만치 멀리 두면 반짝반짝 빛나는 남해 바다가 펼쳐졌다.미국 골프다이제스트가 “경치만큼은 세계 최고 골프장인 미국 사이프러스포인트의 시그니처홀(16번홀)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던 바로 그 홀. 경남 남해 사우스케이프 스파&스위트의 ‘시그니처 홀’(16번홀·파3) 티박스에 올라선 순간은 이랬다.
이 경치에, 이 그린에…
물을 건너야 하는 파3홀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사우스케이프 16번홀은 차원이 다르다. 연못이나 웅덩이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는 구조여서다. 이런 홀은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일단 바다와 맞닿은 곳에 U자 모양의 땅을 갖고 있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다. 정재봉 사우스케이프 회장(81)은 “2007년 이곳을 처음 봤을 때 ‘여기에 반드시 골프장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며 “그때 이곳을 ‘바다를 건너는 파3홀’로 점지해뒀다”고 말했다.그린은 바다 건너편 곶(cape)에 자리잡고 있다. 티박스에서 홀까지 거리는 △블랙 티 206m △블루 티 185m △화이트 티 153m △레이디 티 138m다. 화이트 티 쪽으로 걸어가는 기자의 팔을 정 회장이 붙잡았다. “이 홀만큼은 블루 티에서 쳐보세요. 화이트 티보다 경치가 훨씬 좋거든요.”부담되는 거리였지만, 박완서의 소설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사량도를 가장 좋은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설명에 블루 티에 티를 꽂았다. 담당 캐디는 “바닷바람이 많이 부니 평소보다 두 클럽 길게 잡는 게 낫다”며 “자신 없으면 드라이버를 잡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4번 아이언을 집어넣고 18도 하이브리드를 꺼냈다. 잘 맞으면 200m는 족히 나가는 채다. 힘이 들어갔는지 살짝 ‘뒤땅’이 났고, 공은 여지없이 바다로 빠졌다. 드롭 존은 홀 오른쪽으로 30m 앞에 있었다. ‘칩 인’을 노렸지만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그린은 공을 왼쪽으로 밀어냈다. 명문 골프장답게 그린 속도는 빠른 편(스팀프미터 기준 3.1m)이었다. 2퍼트, 더블 보기. 절경을 본 대가는 꽤나 쓰라렸다.아쉬워하는 기자의 표정을 봤는지, 정 회장이 말을 건넸다. “원래 설계는 지금이랑 정반대였어요. 지금 서 있는 그린이 티박스고, 저 멀리 티박스가 그린이었죠. 그랬다면 순바람을 타고 티샷한 공이 그린에 올랐을 텐데….”
애초 사우스케이프는 골퍼들이 남해를 오른쪽에 끼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식으로 설계됐었다. 그래야 골퍼들이 홀마다 바다를 보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16번홀의 경치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설계였다. 하지만 16번홀의 멋진 자연경관을 못 살리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 설계자 카일 필립스는 정 회장에게 설계 변경을 제안했다. 수백억원을 추가로 들여 전체 코스를 시계 방향으로 재설계하자는 것이었다. 필립스는 스코틀랜드 킹스반스,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야스링크스 등 자연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골프장을 만들어 유명해진 설계가다.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변경을 승인했다. “어쩔 수 있나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시그니처 홀이 나온다는데. 원래대로 설계했다면 16번홀의 경관이 지금처럼 황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 회장은 이 홀과 14번홀, 15번홀 등 세 홀에 ‘트로이카’(세 필의 말이 끄는 썰매)란 이름을 붙였다. 바다로 뛰어드는 말을 연상시키는 이 홀들의 지형이 트로이카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다.
4000억원이 빚어낸 걸작
정 회장이 ‘골프장 주인’으로 변신한 건 올해로 딱 10년째다. 원래 직업은 ‘잘나가는’ 여성복 브랜드 오너였다. 타임·마인·시스템·SJSJ 등 고급 패션브랜드를 거느린 한섬을 만들고 키운 ‘패션맨’이었다. 25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회사를 2012년 현대백화점그룹에 4200억원에 팔았고, 그 돈을 고스란히 사우스케이프를 짓는 데 썼다.골프장, 클럽하우스, 호텔 등 숙박시설 건립에 든 돈만 4000억원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18홀 골프장을 짓는 데 드는 공사비(약 1000억원)의 네 배를 투입한 것이다.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프장을 지으려니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먹으면 골프장 5개를 넣을 수 있는 넉넉한 부지(130만㎡)를 확보했지만, 18개 홀만 뚫었다.
이런 식으로 골프장을 지으면 돈벌이가 안 된다는 걸 패션으로 일가를 이룬 사업가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그때는 골프 인기가 시들한 탓에 지방 골프장은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반도 최남단에 전 재산을 들여 골프장을 지으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실제 그랬다. 사우스케이프는 지을 때도, 2013년 문을 연 뒤에도 ‘돈 먹는 하마’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적자가 쌓이자 정 회장은 서울에 보유하고 있던 건물들을 모두 팔아야 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도대체 얼마나 골프를 좋아하길래 전 재산을 다 걸고 골프장에 매달릴까?”
이날 확인한 정 회장의 골프 실력은 보기플레이 수준이었다. 시니어 티에서 90타보다 조금 더 쳤다. 정 회장은 골프를 좋아하지만 없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마니아’는 아니라고 했다. 적자가 날 걸 알면서도 전 재산을 걸고 사우스케이프를 지은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답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나는 죽어서 이름 대신 골프장을 남기고 싶었다. 사우스케이프는 (수익성을 생각하는) ‘사업가 정재봉’이 아니라 ‘예술가 정재봉’이 지었다”고.
그 덕분에 사우스케이프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코스가 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코스’ 중 9위(2020년)에 올랐을 정도다. 코스만 좋은 게 아니다. 친절한 캐디, 넉넉한 앞뒤 팀 간격(10분), 맛있는 클럽하우스 음식 등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다.다 좋은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가격이다. 이달 그린피는 평일 35만원, 주말 45만원이다. 일반 18홀짜리 골프장보다 하루 30팀이나 적은 50팀만 받기 때문이라지만 비싸긴 비싸다. 명품 코스답게 연예인 할인, 협찬도 없다.
남해=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