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바다 넘겨야 하는 파3홀…자연 앞에서 골퍼는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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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그니처 홀 (1)
사우스케이프 스파&스위트 16번홀
美 골프다이제스트 "세계 최고 경관"
화이트 티 153m·레이디 티 138m
바닷바람 강해 두 클럽 길게 잡아야
韓 최고 '시그니처 홀' 만들기 위해
수백억 들여 전체 코스 재설계
"죽어서 이름 대신 골프장 남기겠다"
타임·마인 거느렸던 '패션맨' 정재봉 회장
2012년 현대百에 회사 판 돈 4000억 '올인'
꾸준한 투자로 '세계 9위 명품코스' 일궈
앞뒤 팀간격 10분…주말 그린피 45만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냥 놀랐다는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수천, 수만 명과 함께 봐야 할 ‘백만불짜리 절경’을 딱 5명(동반자와 캐디 포함)이 10분 동안(티오프 간격) ‘전세’를 내도 되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앞에는 마치 ‘애플 로고’처럼 땅의 왼편을 바다에 내준 파3홀이, 시선을 저만치 멀리 두면 반짝반짝 빛나는 남해 바다가 펼쳐졌다.미국 골프다이제스트가 “경치만큼은 세계 최고 골프장인 미국 사이프러스포인트의 시그니처홀(16번홀)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던 바로 그 홀. 경남 남해 사우스케이프 스파&스위트의 ‘시그니처 홀’(16번홀·파3) 티박스에 올라선 순간은 이랬다.
이 경치에, 이 그린에…
부담되는 거리였지만, 박완서의 소설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사량도를 가장 좋은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설명에 블루 티에 티를 꽂았다. 담당 캐디는 “바닷바람이 많이 부니 평소보다 두 클럽 길게 잡는 게 낫다”며 “자신 없으면 드라이버를 잡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4번 아이언을 집어넣고 18도 하이브리드를 꺼냈다. 잘 맞으면 200m는 족히 나가는 채다. 힘이 들어갔는지 살짝 ‘뒤땅’이 났고, 공은 여지없이 바다로 빠졌다. 드롭 존은 홀 오른쪽으로 30m 앞에 있었다. ‘칩 인’을 노렸지만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그린은 공을 왼쪽으로 밀어냈다. 명문 골프장답게 그린 속도는 빠른 편(스팀프미터 기준 3.1m)이었다. 2퍼트, 더블 보기. 절경을 본 대가는 꽤나 쓰라렸다.
애초 사우스케이프는 골퍼들이 남해를 오른쪽에 끼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식으로 설계됐었다. 그래야 골퍼들이 홀마다 바다를 보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16번홀의 경치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설계였다. 하지만 16번홀의 멋진 자연경관을 못 살리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 설계자 카일 필립스는 정 회장에게 설계 변경을 제안했다. 수백억원을 추가로 들여 전체 코스를 시계 방향으로 재설계하자는 것이었다. 필립스는 스코틀랜드 킹스반스,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야스링크스 등 자연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골프장을 만들어 유명해진 설계가다.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변경을 승인했다. “어쩔 수 있나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시그니처 홀이 나온다는데. 원래대로 설계했다면 16번홀의 경관이 지금처럼 황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 회장은 이 홀과 14번홀, 15번홀 등 세 홀에 ‘트로이카’(세 필의 말이 끄는 썰매)란 이름을 붙였다. 바다로 뛰어드는 말을 연상시키는 이 홀들의 지형이 트로이카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다.
4000억원이 빚어낸 걸작
골프장, 클럽하우스, 호텔 등 숙박시설 건립에 든 돈만 4000억원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18홀 골프장을 짓는 데 드는 공사비(약 1000억원)의 네 배를 투입한 것이다.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프장을 지으려니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먹으면 골프장 5개를 넣을 수 있는 넉넉한 부지(130만㎡)를 확보했지만, 18개 홀만 뚫었다.
이런 식으로 골프장을 지으면 돈벌이가 안 된다는 걸 패션으로 일가를 이룬 사업가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그때는 골프 인기가 시들한 탓에 지방 골프장은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반도 최남단에 전 재산을 들여 골프장을 지으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실제 그랬다. 사우스케이프는 지을 때도, 2013년 문을 연 뒤에도 ‘돈 먹는 하마’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적자가 쌓이자 정 회장은 서울에 보유하고 있던 건물들을 모두 팔아야 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도대체 얼마나 골프를 좋아하길래 전 재산을 다 걸고 골프장에 매달릴까?”
이날 확인한 정 회장의 골프 실력은 보기플레이 수준이었다. 시니어 티에서 90타보다 조금 더 쳤다. 정 회장은 골프를 좋아하지만 없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마니아’는 아니라고 했다. 적자가 날 걸 알면서도 전 재산을 걸고 사우스케이프를 지은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답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나는 죽어서 이름 대신 골프장을 남기고 싶었다. 사우스케이프는 (수익성을 생각하는) ‘사업가 정재봉’이 아니라 ‘예술가 정재봉’이 지었다”고.
그 덕분에 사우스케이프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코스가 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코스’ 중 9위(2020년)에 올랐을 정도다. 코스만 좋은 게 아니다. 친절한 캐디, 넉넉한 앞뒤 팀 간격(10분), 맛있는 클럽하우스 음식 등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다.다 좋은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가격이다. 이달 그린피는 평일 35만원, 주말 45만원이다. 일반 18홀짜리 골프장보다 하루 30팀이나 적은 50팀만 받기 때문이라지만 비싸긴 비싸다. 명품 코스답게 연예인 할인, 협찬도 없다.
남해=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