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살아남은 혁신 아이콘 레고…인플레 파도도 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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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PC 발달로 2004년 파산 위기1932년 덴마크에서 ‘재미있게 놀아라’라는 철학으로 시작한 레고는 21세기 들어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PC, 게임기 등 새로운 놀잇감이 생겨나면서 레고가 ‘시시한 아날로그 장난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거센 디지털 바람도 맞았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주 고객층인 아이들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어드는 인구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 때마다 레고는 ‘블록 놀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혁신을 꾀했다. 유명 장난감 회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와중에도 레고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블록으로 돌아가자' 철학 지킨 혁신에
2007년 이후 12년 연속 매출 증가
성인 소비자 지속 유입하며
유튜브·넷플릭스 공세에도
지난해 매출 전년대비 27% 급증
세 번째 과제는 인플레이션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대규모 적자..."블록으로 돌아가자"
레고의 첫 위기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됐다. 1998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해 이듬해 1000여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레고 그룹의 오너가는 어려운 경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의류, 시계, 테마파크 등 레고를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결과는 대규모 적자. 2004년 2억70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며 파산 직전까지 갔다.오너 가문은 가족 경영에서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꾸고 30대 중반의 젊은 대표를 영입했다.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의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는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기보다는 기존 철학을 유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가 생각한 레고의 본질은 블록을 조립하는 것이었다. ‘블록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rick)’는 슬로건 하에 수익성을 높이는 데에 집중했다. 잘 쓰이지 않는 특수 블록은 과감히 없애고 표준 블록 사용률을 70%까지 높였다. 물류센터를 통합하고 원재료 거래 업체도 5분의 1로 줄여 비용을 절감했다. 테마파크 사업, 의류사업 등도 정리했다.5~9세의 기존 고객들에 집중하는 동시에 다양한 나이대의 고객도 공략하기 시작했다. 워너브라더스, 디즈니 등 콘텐츠 회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다양한 상품들을 내놓은 것이다. 레고의 스타워즈(1999년), 해리포터(2001년) 시리즈는 소위 ‘대박’을 터뜨렸지만 상당한 금액을 브랜드 수수료로 지불해야 했다. 크누스토르프 대표는 일본의 닌자를 차용한 ‘닌자고’ 등 자체 개발 시리즈를 선보였다.배트맨, 반지의 제왕 등 영화를 바탕으로 한 시리즈도 적극적으로 내놓으면서 소비자층을 어린이에서 성인까지 확장했다. 2007년부터 매출은 12년 연속 증가했다. 2012년에는 ‘해즈브로’를 제치고 바비인형 제조사 ‘마텔’에 이어 세계 2위 완구 업체로 등극했다.
블록에 디지털을 결합하다
또 한번의 위기는 2017년에 찾아왔다. 스마트폰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장난감 산업에 더 큰 타격을 줬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동영상 콘텐츠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2017년 레고의 매출은 전년 대비 8% 가량 감소한 47억유로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도 17% 급감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어린이들은 더이상 레고에 열광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다른 장난감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최대 장난감 유통업체 토이저러스는 2017년 9월 파산 신청을 했고 북유럽 최대 장난감 회사 탑토이도 이듬해 파산 선고를 받았다. 마텔도 대규모 인력 감축에 나섰다.레고의 타개책은 이번에도 ‘블록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기존 블록쌓기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했다. 2017년 10월 대표로 임명된 IT전문가 닐스 크리스티안센 대표이사(CEO)는 레고에 증강현실(AR)을 접목한 새 시리즈를 출시했다.온라인 플랫폼도 키웠다. 고객들이 블럭 상품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레고 아이디어스’, 레고 세계관을 창조하는 ‘레고 월드 빌더’를 만들면서 충성도를 높였다. 레고 캐릭터를 활용한 커뮤니티인 ‘레고 라이프’ 앱도 만들었다. 플랫폼이 커지면서 레고 전용 소비자 직접 판매(D2C) 채널로 판매하는 제품도 늘렸다.
레고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 특수를 누리며 폭발적인 매출 증가율을 기록했다. 봉쇄 기간 동안 소비자들이 실내 놀거리로 레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90년 역사를 지닌 레고는 아이들에게 여전한 인기 장난감이었고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레고 매출은 2019년 52억유로에서 2020년 59억유로, 작년에는 전년 대비 27% 급증한 74억유로를 기록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극복할까
레고의 호실적을 단순히 봉쇄 효과가 이끌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간 다양한 연령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군을 보유했다는 점이 주효했다. 다양한 크기와 난이도를 자랑하는 레고 시티, 레고 테크닉, 레고 크리에이터 엑스퍼트 등은 어른들에게도 재미를 선사했다.코로나19가 극심했던 2020년 상반기에 레고는 자체 이커머스 플랫폼을 활용한 덕에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오프라인 마케팅도 멈추지 않았다. 레고그룹은 작년에만 165개의 신규 매장을 설립했다. 레고 세계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만져봐야한다는 판단에서다.올들어 레고그룹은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원가 부담이 높아졌고 ESG 경영을 강화하면서 선보인 ’친환경 블록‘에 일부 매니아층은 반발하고 있다.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기존 레고의 느낌이 살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글로벌 완구시장 정체 속에서 레고그룹의 위기 극복 능력이 다시 한 번 발휘될 지 유통업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한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