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리학자 권력집단으로 변질하며 신분제 고착화…상공업 퇴조, 쇄국정책으로 국제 교류도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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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2
(99) 조선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6가지 이유조선은 농업 위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벼농사는 식량을 제공하는 근간산업이며 낮은 산들과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한 산업이었다. 조세를 징수하고 백성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데도 편리했다. 조선은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실질적으로 주거 이전의 자유를 빼앗았다. 반면 공업과 상업, 어업, 무역은 억압하고 천시했다. 산업은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고 확장할 수 있으므로 사회의 가치관과 신분제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기술력을 갖추고, 정보를 공유하며, 부유한 데다 실용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을 갖춘 전문가 집단은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산업의 발달을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 결과 산업과 경제활동은 정체 상태에 머무르거나 후퇴해 국가의 부가 증가할 수 없었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화했으며 멸망 때까지 고수했다. 건국 초기부터 표방한 ‘사대교린’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교류한다는 방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쇄국정책이었다. 명나라는 왜구의 발호와 내부의 정치적 문제,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해금정책을 추진했고, 일본은 쇄국이라는 기조 속에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하고 왜구의 존재도 묵인하는 정책이었다. 반면 조선은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국제적인 환경과 명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나 내부적인 이유로 개방정책을 취하거나 여러 나라와 외교나 무역을 할 의도가 없었다. 개방을 허용하면 다른 체제의 존재와 성격을 확인할 수 있고,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수용하고 경험할 수 있어 서열 체제 속에서 누리는 양반들의 특권과 조선사회의 근간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쇄국정책 탓에 신문물과 기술의 수용이 부족했고, 국제관계를 파악하는 능력과 외교술이 미숙했으므로 국방 등 주변국과 관계된 사업을 등한시했다. 결과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참혹한 결과였다.외세에 의존하는 성격과 체제도 더 강해졌다. 건국하는 과정에서 국호를 선택하는 데 명나라의 허락을 구했고, 명나라의 연호를 수용했다. 이후 정치적인 선택과 외교 관계의 기본 성격을 결정하는 데도 명나라의 간섭과 영향을 받았다. 외세 의존적 정권은 상실된 자주성을 감추거나 왜곡시킬 의도로 내부를 더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내부에서 정통성이 허약하고, 정치적인 도전이 심각할 때는 외세에 더 의존한다. 조선은 세종대왕 이후에 사대성이 심해진 탓에 명나라의 간섭과 조공품의 양이 늘어나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사료에 나타나듯 산업 발달이 위축돼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양반들의 문화와 예술의 독점 현상도 두드러졌다. 전국에 설치한 향교와 서원 등을 네트워크화해 유교를 종교와 사회윤리로서 교육했다. 동시에 전통신앙과 불교, 습속 등을 억압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 명나라의 문화를 모방한 ‘시(詩)’ ‘서(書)’ ‘화(畵)’란 장르를 창작하고 누리는 등 예술을 독점했다. 반면 실생활에 기초한 문화, 평민들이 참여한 놀이와 예술은 천시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화와 예술은 관념적이고, 자의식이 약하고, 계급적이었다.
초기 개혁세력의 이상과 실천 의지가 이렇게 몇 가지 성격으로 변질되면서 조선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바다 건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조선의 보수와 진보는 권력과 경제권의 장악을 놓고 피 흘리는 당쟁을 벌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대사화를 겪고, 다시 성리학을 표방하고 ‘이기론 논쟁’을 펼치면서 동서로 나뉘어 또 다른 권력투쟁을 하고 있었다.이상과 원론, 사상은 중요하지만 결국은 운용하는 사람과 세력, 그리고 상황에 따라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조적인 논리와 열정적인 이상론자들보다 차라리 실용적인 사상과 적응력이 뛰어난 현실적인 인물들이 오류를 범할 확률이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