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음악 디바' 임선혜의 즐거운 '뮤지컬 나들이'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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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앨범 ‘THE MAN I LOVE’ 쇼케이스뮤지컬 넘버(삽입곡)를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 들을 기회는 드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목 넘버’는 지난 2월 27일 역삼동 LG아트센터 마지막 공연이었던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 박혜나가 무선 마이크를 떼고 불렀던 앙코르 송 ‘잔을 높이 들고’였습니다. 확성 장치 없이 공연장의 좋은 음향 환경을 타고 퍼지는 맑고 고운 생(生)목소리와 노래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별미(別味)였습니다.
'나는 나만의 것''싱크 오브 미' 등 열창
번스타인·거슈인 등 대표 넘버 9곡 수록
"뮤지컬은 제 음악인생의 재밌는 피크닉
본업으로 돌아가 '독일 칸타타' 녹음 "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오드 포트(ODE PORT)에서도 귀한 별미를 맛봤습니다. 소프라노 임선혜의 뮤지컬 앨범 ‘THE MAN I LOVE’(유니버설뮤직) 쇼케이스 현장입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임선혜는 피아니스트 문재원의 반주에 맞춰 ‘생목’으로 앨범에 수록된 세 곡을 불렀습니다.첫 곡은 앨범 타이틀 곡인 ‘더 맨 아이 러브(The man I love)’입니다. 192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뮤지컬 ‘스크라이크 업 더 밴드’에 실린 넘버로 조지 거슈윈이 작곡하고 형인 아이라 거슈윈이 작사했습니다. 거슈윈 특유의 낭만적인 멜로디와 재즈적인 감수성이 넘치는 곡으로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등 전설적인 재즈 보컬들이 녹음을 남긴 재즈계 명곡입니다. 임선혜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리릭 소프라노의 음색을 그대로 살려 풍부한 표정으로 이 곡을 열창했습니다.
다음 곡은 헝가리 출신 실베스터 르베이가 작곡한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Ich Gehör Nur Mir)’. 뮤지컬 애호가라면 공연장에서 옥주현이나 김소현이 한국어로 부르는 ‘나는 나만의 것’을 기억할 만합니다. 타이틀롤인 엘리자벳이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열창하는 이 작품의 대표 넘버입니다. 임선혜는 세미클래식 풍의 정통 뮤지컬 넘버인 이 곡을 원어인 독일어로 불렀습니다. 뮤지컬 넘버치고는 음역이 넓고 감정의 진폭이 큰 이 곡을 드라마틱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뮤지컬 무대의 감동이 잠시 되살아났습니다. 원곡 키보다 두 음 높게 불렀다고 했는데 대단합니다.
마지막 곡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중 ‘싱크 오브 미(think of me)’입니다. 극 중 오페라 가수 크리스틴의 대표곡인데 굳이 분류하자면 ‘리릭 콜로라투라’에 속하는 임선혜의 음색에 가장 잘 맞는 곡입니다. 임선혜는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키가 잘 안 맞는지 중단하고 키를 반음 정도 높여 다시 불렀습니다. 곡 후반에 소프라노의 콜로라투라적인 고난도 기교를 발휘해야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른 시간에 시차 적응도 안 돼 제 컨디션이 아닌데도 주 종목 답게 너끈하게 처리했습니다.임선혜는 2015년 5월 EMK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한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 역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저는 뮤지컬 담당 기자로서 이 작품을 취재하고, 임선혜의 첫 무대를 관람했습니다. 당시 세계 무대를 누비던 ’고(古)음악계 디바‘가 뮤지컬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던 공연입니다.
고음악은 14~18세기 르네상스·바로크·고전주의 음악을 당대의 악기와 주법, 창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임선혜는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1999년 벨기에 출신 거장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에게 발탁돼 고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후 풍부한 감성과 투명한 음색, 당찬 연기력으로 유럽 고음악계 정상에 섰습니다. 이런 임선혜가 확성 장치를 쓰는 대중 상업예술 장르인 뮤지컬, 그것도 국내 초연인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 출연한다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선혜는 이날 쇼케이스에 이은 간담회에서 뮤지컬 데뷔 사연을 얘기했습니다. 요약하면 당시 ‘팬텀’ 공연을 연출한 로버트 요한슨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들인 것이죠. ‘팬텀’은 ‘오페라의 유령’과 원작이 같습니다. 당연히 극 중 크리스틴의 직업도 오페라 가수입니다. 크리스틴이 ‘팬텀’에서 부르는 노래는 난도가 높을 뿐 아니라 분량도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보다 많습니다. 주로 성악 창법으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현역 소프라노가 맡기에 제격입니다.임선혜는 첫 공연에서 뮤지컬 전문 배우 못지않은 끼와 연기력으로 무대를 누볐고, 고난도의 넘버들을 물 만난 고기처럼 유연하고 완벽하게 소화하며 작품 흥행에 일조했습니다.
뮤지컬에 데뷔했다지만 출연한 작품은 ‘팬텀’뿐입니다. 초연과 이듬해 재연, 지난해 삼연까지 모두 34회 출연했습니다. 이번에 뮤지컬 앨범을 내게 된 것도 ‘팬텀’이 계기를 마련해 줬다고 했습니다. “딱 1년 전 MBC ‘TV예술무대’ 출연이 초석이 됐어요. 당시 ‘팬텀’을 공연하던 중이었는데 클래식 곡을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뮤지컬 곡들로만 리사이틀을 했습니다. 그때 문재원 씨 등 같이 작업했던 뮤지션들과 앨범을 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국내에서 제작한 임선혜의 첫 솔로 음반인 ‘THE MAN I LOVE’에는 총 아홉 곡이 수록됐습니다. ’나는 나만의 것‘을 제외하면 모두 영미권 넘버입니다. 1~3번 트랙은 레너드 번스타인 곡인 ‘Dream With Me’('피터 팬'), ‘A Little Bit In Love’(‘원더풀 타운’), ‘Tonight’(‘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4번과 5번은 거슈윈 곡인 ‘The Man I Love’와 ‘Summertime’(‘포기와 베스')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하는 음악가의 긍지로 번스타인과 거슈윈의 곡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래식과 대중적인 뮤지컬을 잇는 뛰어난 다리가 된다고 생각해서 두 작곡가 곡을 꼭 넣고 싶었어요. 모두 평소에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곡들이기도 하고요."‘팬텀’에서 유령과 함께 부르는 ‘내 고향(home)’도 수록됐습니다.‘싱크 오브 미’와 함께 원작이 같은 뮤지컬의 넘버를 실은 이유에 대해서는 “‘오페라의 유령’ 못지않은 ‘팬텀’이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유일한 뮤지컬 출연작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대표곡인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에선 임선혜의 특기인 휘파람이 한 대목 들어갑니다. 휘파람을 넣게 된 사연을 소개하며 녹음된 선율 부분을 직접 불어주었는데요. 귀가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휘파람이었습니다. 원래 원곡에는 휘파람 대목이 없지만, 브로드웨이 초연에서 일라이자를 연기한 줄리 앤드류스도 휘파람을 잘 불었습니다. 앤드류스가 멋진 휘파람 소리를 들려주는 뮤지컬 ‘캐멀롯’ 넘버 ‘what do the simple folk do'를 임선혜라면 더 멋들어지게 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고음악계 디바’가 뮤지컬 앨범을 낸 것에 대해선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이런 앨범을 내서 걱정하시는 분도 있을 거 같아요. 음반을 받았는데 아직 무서워서 못 들었어요. 많은 분이 들으면서 ‘성악가가 이걸 왜 했지’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라고 열린 마음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뮤지컬 무대에 서고 뮤지컬 앨범까지 낸 것을 ‘피크닉’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창(唱)이나 트로트 등 다방면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성악을 시작한 이후 평생 이 길로만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다 고음악에서 이름을 알리고 나서 이렇게 번외의 피크닉을 갈 기회가 생긴 것이 정말 행운입니다.”
향후 뮤지컬 출연 의사를 묻는 질문에는 “정말 좋아하는 번스타인의 ‘원더풀 타운’이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작품이 제가 더 나이가 들기 이전에 제작돼 기회가 주어진다면 출연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악가로서 확성 장치를 써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어려움도 털어놨습니다. “확성을 통해 나가는 제 목소리가 너무도 낯설어요. 마이크 소리에 제 귀가 익지 않아서 긴장하게 됩니다. 서른네 번의 뮤지컬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제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잘 모르고 한 것 같아요. 나중에 제가 다시 하게 된다고 해도 이런 갭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조건과 고충을 고려하면 임선혜를 향후 뮤지컬 무대에서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스타인의 작품은 음악은 좋을지 몰라도 흥행성이 떨어져 국내 여건상 제작되기 쉽지 않고, 음향 환경도 쉽게 개선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어서 그렇습니다.임선혜는 이날 뮤지컬 앨범 쇼케이스 등 ‘피크닉’ 관련 일정을 마친 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이달 말 세종문화회관의 ‘디어 슈베르트’ 공연과 다음달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리사이틀 등 국내 일정을 소화한 후 독일로 돌아가 새 음반을 녹음한다고 했습니다. ‘독일 칸타타’ 앨범인데 기대가 큰 듯 다소 들뜬 목소리로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독일어로 된 바흐와 텔레만, 이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카이저, 가우프너 등 낯선 작곡가의 칸타타를 녹음합니다. 2년 전 발매돼 좋은 평을 받은 ‘버림받은 디도’의 속편 격인 앨범인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바흐의 ‘웨딩 칸타타’도 들어가요. 정말 기대되는 작업입니다.”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