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윤동주 마지막 시…육첩방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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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1917~1945) : 북간도 명동 출생.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가 80년 전에 남긴 마지막 시입니다. 일본 도쿄의 릿쿄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1942년 6월 3일에 썼지요. ‘쉽게 씌어진 시’라는 제목은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첫 구절에서 벌써 나라 없는 청년의 고뇌가 짙게 묻어납니다.
육첩방(六疊房)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다다미 6장을 깐 좁은 방(약 3평)을 말합니다. 일본 다도(茶道)에서 소박한 다실(茶室)을 표현할 때 ‘다다미 넉 장 반’이라고 하니 얼마나 좁은지 짐작할 만하지요.
이 시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윤동주가 죽은 지 2년 만에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대 최고 시인인 정지용이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소개 글과 함께 발표했지요. 그의 기일(2월 16일)에 맞춰 정지용 등 30여 명이 소공동 플라워회관에서 추도회를 열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그 시절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 4면, 다른 날은 2면을 발행했습니다. 주필인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를 싣고 해설을 곁들였는데, 다음이 주요 내용입니다.
“복강(지금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만 28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 16일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저희)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윤동주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은 같은 해 3월 13일, 7월 27일자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 기숙사의 삼총사 중 한 명인 그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보낸 편지 속의 시 5편을 몰래 숨겨서 보관했다가 빛을 보게 한 일등공신입니다.
그러나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1년 뒤 일경에게 붙잡히고, 결국 차가운 감옥에서 캄캄한 최후를 맞았지요.
동주의 흔적은 교토와 후쿠오카 등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도시샤대 교정과 하숙집이 있던 자리인 교토조형예술대에 그의 시비가 서 있고, 체포되기 한 달 전 학우들과 소풍 가서 사진을 찍은 우지(宇治)시의 우지천(川) 옆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막혔던 국경이 다시 열리면 동주의 숨결을 따라 일본으로 인문기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1917~1945) : 북간도 명동 출생.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가 80년 전에 남긴 마지막 시입니다. 일본 도쿄의 릿쿄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1942년 6월 3일에 썼지요. ‘쉽게 씌어진 시’라는 제목은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첫 구절에서 벌써 나라 없는 청년의 고뇌가 짙게 묻어납니다.
육첩방(六疊房)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다다미 6장을 깐 좁은 방(약 3평)을 말합니다. 일본 다도(茶道)에서 소박한 다실(茶室)을 표현할 때 ‘다다미 넉 장 반’이라고 하니 얼마나 좁은지 짐작할 만하지요.
옥사한 지 2년 뒤에야 국내 소개
윤동주는 도쿄 교외의 이층집에서 하숙했습니다. 그곳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2층의 하숙방은 그야말로 육첩방이었는데 동주는 교토로 옮겨가려고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고 훗날 얘기했습니다. 그해 10월 교토의 도시샤대에 편입한 윤동주는 이듬해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죠.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가려고 기차표를 사놓고 짐도 부친 상태였습니다.이 시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윤동주가 죽은 지 2년 만에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대 최고 시인인 정지용이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소개 글과 함께 발표했지요. 그의 기일(2월 16일)에 맞춰 정지용 등 30여 명이 소공동 플라워회관에서 추도회를 열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그 시절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 4면, 다른 날은 2면을 발행했습니다. 주필인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를 싣고 해설을 곁들였는데, 다음이 주요 내용입니다.
“복강(지금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만 28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 16일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저희)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윤동주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은 같은 해 3월 13일, 7월 27일자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 기숙사의 삼총사 중 한 명인 그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보낸 편지 속의 시 5편을 몰래 숨겨서 보관했다가 빛을 보게 한 일등공신입니다.
교토 등 곳곳에 윤동주 시비와 흔적
동주는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무얼 바라’ ‘홀로 침전’했던 걸까요. 식민지 유학생으로 어두운 시대를 견디는 ‘슬픈 천명’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는 구절에서 새로운 시대의 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그러나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1년 뒤 일경에게 붙잡히고, 결국 차가운 감옥에서 캄캄한 최후를 맞았지요.
동주의 흔적은 교토와 후쿠오카 등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도시샤대 교정과 하숙집이 있던 자리인 교토조형예술대에 그의 시비가 서 있고, 체포되기 한 달 전 학우들과 소풍 가서 사진을 찍은 우지(宇治)시의 우지천(川) 옆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막혔던 국경이 다시 열리면 동주의 숨결을 따라 일본으로 인문기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