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유연하고 시원하게 첨벙!, 호크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예술가의 초상'. 1972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물이 강렬한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네요. 잔물결까지도 세세하게 보이니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시선을 인물들로 돌려보면, 물 안에선 한 남성이 수영을 하고 있고 밖에선 빨간 옷을 입은 남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 안과 밖, 이 경계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수영하던 남성이 다시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돌아가, 이대로 단절되고 말까요. 영국 출신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1937~)의 '예술가의 초상'이란 작품입니다. 호크니는 생존하고 있는 화가 중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꼽힙니다.

'예술가의 초상'은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9030만 달러(약 1168억 원)에 낙찰돼, 현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해 미국 작가 제프 쿤스의 '토끼'가 9110만 달러를 기록하긴 했지만, 이 작품이 조각인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회화 중에선 '예술가의 초상'이 가장 비쌉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을 비롯해 호크니 하면 '물'이 먼저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그는 '더 큰 첨벙' '닉의 수영장에서 나오고 있는 피터' '수영하는 나탄, 로스앤젤레스' 등 수영장 시리즈뿐 아니라, '어느 가정, 로스앤젤레스' '샤워하는 사람, 비버리힐스' 와 같은 샤워 시리즈, 연못과 웅덩이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을 그려 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호크니의 삶도 물과 닮았습니다. 그는 어떤 제약과 변화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살에 몸을 맡긴 채 유영하듯 즐겼습니다. 게다가 85세가 된 요즘엔 아이패드와 포토샵을 이용해 작업을 한다고 하네요. 이보다 더 유연하고 감각적인 노장이 있을까요. 그 시원하고 청량한 호크니의 삶 속으로 풍덩 빠져보겠습니다.
'더 큰 첨벙', 1967
호크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재능도 특출났습니다. 프래드포드 예술고를 다녔을 땐 하루에 12시간 넘게 작업에 매달렸고, 영국왕립미술학교에 가선 재능을 인정받아 수석 졸업했습니다. 26살이 됐을 땐 런던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무명 시절도 없이 곧장 미술 시장에서 각광받는 미술가가 된거죠.

호크니가 내세운 이미지 전략도 효과적이었던 같습니다. 호크니의 외모는 앤디 워홀처럼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늘 금발로 머리를 염색하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호크니에게도 고민이 한 가지 있었는데요. 동성애자였던 그는 늘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굴레에 오래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스스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 제약으로부터 적극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영국보다 동성애에 관대했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예술가의 초상'에 나온 빨간 옷을 입은 남자도 호크니가 미국에서 만난 11살 연하의 동성 연인 피터 슐레진저입니다. 호크니는 UCLA에서 미술사범대 교수로 일하던 중,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의 초상'은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 그린 작품입니다. 이 점을 알고 보면, 물 안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은 슬픔에 빠진 호크니인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물 안과 밖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이런 이별 상황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수영장 시리즈는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의 밝고 화창한 날씨, 태양 아래서 마음껏 수영하는 사람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문화에 사로잡혔습니다.

수영장 시리즈 중 '더 큰 첨벙'도 호크니의 대표작입니다. 수영장 뒤편엔 주택과 야자수 등이 있는데, 고요하고 정적으로 느껴집니다. 반면 수영장에선 물이 강렬하고 역동적으로 튀어 오르고 있습니다. 물이 튀는 찰나를 포착해서 단숨에 그려낸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호크니는 이 순간을 그리기 위해 2주 넘게 매달렸습니다. 카메라로 물이 튀는 순간을 여러 각도로 찍고 연구했습니다. 물의 형태와 무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보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담아내려 한 겁니다.
'어느 가정, 로스앤젤레스', 1963
호크니의 물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가 영국에서 그렸던 '어느 가정, 로스앤젤레스'란 작품에서 샤워하는 남성을 살펴보실까요. 그에게 쏟아지는 물이 샤워기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뿐 아니라 굵은 회색 물줄기로도 표현돼 있네요. 샤워물을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그려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쯤 되면 호크니가 왜 이토록 물에 천착하는 건지 궁금해지는데요. 물이 가진 '개방성'에 매료됐기 때문이었습니다. 호크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실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어떤 색도 될 수 있고, 시각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으로도, 어떤 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물엔 화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온전히 투영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수영하는 나탄, 로스앤젤레스', 1982
호크니 자체도 굉장히 개방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사진, 판화, 무대 디자인 등 여러 장르에 도전했습니다. '수영하는 나탄, 로스앤젤레스'는 사진 여러 장을 모아 하나의 큰 화면에 조합,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장면을 볼 수 있게 한 '포토콜라주' 작품입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과거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팩스 기기로 작업을 많이 했고, 최근엔 아이패드 등을 적극 활용하며 디지털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은 그보다 짧은 '첨벙!' 하고 물이 튀는 찰나와 더 비슷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듯하지만 순간일 뿐이고, 순간인 듯하지만 영원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그 순간이 소중하기도, 또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 깊게 들어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 고민이 드신다면, 호크니 같은 삶의 태도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호기심을 최대한 장착하고, 또 다시 찾아올 영원 같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나는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