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도로와 수레가 좋다면 조선은 가난하지 않을 것"…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 남긴 물류·상업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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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동서 간 거리가 1000리고 남북은 그것의 세 배가 된다. 그 가운데 서울이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서울로 물자가 모여드는 데는 실제로 동서 500리, 남북 1000리에 불과하다. (중략)윗글은 조선 후기 실학자 초정 박제가(1750~1805)가 28세 때인 1778년 쓴 《북학의(北學議)》의 한 대목입니다. 북학의는 ‘조선의 국부론’이라고 할 만한데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나라가 잘사는 방법을 모색했듯이 박제가 역시 《북학의》에서 그것을 탐색했습니다. 박제가를 ‘조선의 애덤 스미스’로 부르는 이유죠.박제가는 가난에 찌든 조선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을 고민했어요. 서얼(庶蘖)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절망해 있던 박제가는 당대의 선진국 청나라를 가보고 싶어 했지요. 조선의 선비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고 상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박제가는 달랐습니다. 박제가는 1778년 청나라로 가는 사은사(謝恩使) 행렬에 끼어 꿈에도 가고 싶어 했던 청나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단언하건대 그것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전주의 장사꾼은 생강과 참빗을 짊어지고 의주까지 간다.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걷느라 모든 근력이 다 빠진다. 원산에서 미역과 마른 생선을 싣고 왔다가 사흘 만에 다 팔면 적은 이익이나마 생긴다. 하지만 닷새가 걸리면 본전만 하게 되고, 열흘이나 머물면 오히려 본전이 크게 줄어든다. (중략)영동 지방의 경우 꿀은 생산되나 소금이 없고, 평안도 관선에서 철은 생산되나 감귤이 없으며, 함경도는 삼이 흔해도 무명은 귀하다. 산골에는 붉은 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생선젓과 메기가 흔하다. 영남 지방에선 명지(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청산과 보은에는 대추가 많이 나고, 강화에는 감이 많다. 백성들은 이런 물자를 서로 이용하여 풍족하게 쓰고 싶어도 힘이 미치지 않는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홍대용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으려면 토지 몇 결은 없어지겠지만 수레를 사용해서 얻는 이익이 그것을 넉넉히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레는 오르막은 꺼리지 않지만 빠지는 곳은 꺼린다. 지금 저잣거리의 작은 도랑은 반드시 복개해서 지하로 흐르도록 하고, 세로로 걸쳐 놓은 나무다리는 모두 가로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중략)
우리나라는 배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 물이나 빗물이 새어드는 것도 막지 못한다. 짐을 많이 싣지 못하고 배에 탄 사람도 편하지 않다. 말을 배에 태울 때는 상당히 위태롭다. 이러니 배를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이로움이 한 가지도 없는 것이다. (하략)
박제가는 선진 문물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도로, 수레, 교량, 시장, 상품, 상업, 퇴비, 기와, 벽돌, 창문, 목축, 소와 말, 된장, 총과 화살, 논농사와 밭농사 등이 조선과 어떻게 다른지 기록했습니다.그는 청나라가 잘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뛰어난 물류 시스템과 상업을 꼽았습니다. 잘 닦인 도로, 많은 물량을 한 번에 나르는 수레. 그것은 원활한 물품과 정보의 이동을 의미했습니다. 박제가는 김포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북학의》를 썼습니다. 얼마나 쓰고 싶었으면 여독도 풀지 않고 바로 썼겠습니까? 박제가는 도로를 깔자, 수레를 만들자, 상업을 장려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진북학의)을 정조 왕에게 올렸죠.
윗글의 주제는 물류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간접자본의 핵심인 도로와 교통수단(수레와 배)을 늘리고, 물자와 정보가 잘 흐르도록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죠. 물류의 3박자인 도로와 수레, 배가 형편없으니 동서남북에서 나는 물자가 교류되지 않고, 돈을 벌기 힘드니 상업이 피폐해지고, 그러니 생산이 잘 되지 않는다는 거죠. 박제가의 절규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200여 년 뒤, 이 땅에 드디어 경부고속도로와 수많은 도로가 건설됐어요. 화물차가 질주하고 큰 배가 대양을 누비게 됐죠. 박제가가 《북학의》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지금 당장 반드시 시행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에 쏟은 정성은 후세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다.”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