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어 짜냈다"…천하의 BTS도 녹초 만든 K팝 시스템의 그늘 [이슈+]

월드스타 방탄소년단 팀 활동 잠정 중단에 '혼란'
K팝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 대한 비판 제기
아이돌 병역 문제도 소프트파워 정책 향방 가를 것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
"K팝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두지 않는다. 계속 무언가를 찍어내야 하니까 내가 성장할 시간이 없다. 랩을 번안하는 기계가 됐고, 팀은 방향성을 잃었다. 생각한 후에 돌아오고 싶은데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 무례해지는 것 같았다." -방탄소년단(BTS) RM
"가사 쓸 때 이제 할 말이 안 나온다. 억지로 쥐어짜 내고 있어 너무 괴롭다. 예전엔 할 말은 있어도 스킬이 없었는데, 지금은 할 말이 없다." - 방탄소년단(BTS) 슈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던가.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 큰 족적을 남긴 방탄소년단이 고백한 속내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화려한 '월드 스타'의 이면엔 녹초가 된 개인만이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쳇바퀴 같은 K 팝 아이돌 시스템에 놓여 개인의 성장보다 팀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방탄소년단이 본격적인 '자아 찾기'에 나섰다. 연 매출 1조, 자산 규모 4조원에 육박하는 하이브의 명운을 쥔 이들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9년이다.방탄소년단은 지난 14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음악 및 공연 등 단체 활동을 멈추고 솔로 앨범 발매, 다양한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 등을 통해 개별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발매한 앤솔로지 앨범 'Proof'(프루프)를 챕터 1의 마지막으로 쉼표를 찍고 챕터 2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RM은 "10년간 방탄소년단을 하며 물리적인 스케줄을 진행하다 보니 내가 숙성이 안 되더라. 우리가 최전성기를 맞은 시점에서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지 기능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팀이 뭔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몰랐다"고 했다.

정국은 "근 10년 동안 같이 해 왔는데 개인적으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한 단계 성장해 여러분들에게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며 "지금보다 나은 일곱명이 분명히 되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거들었다.제이홉은 "멤버들과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조금 찢어져 봐야 붙을 줄도 안다"며 "건강한 플랜이라는 걸 인식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RM은 "내가 쉬고 싶다고 하면 여러분이 미워하실까 봐, 죄짓는 것 같아서"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난 방탄소년단을 오래 하고 싶다"며 "그러려면 내가 나로서 남아있어야 생각한다. 앞을 위해 나아가려는 진심을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고백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솔로 활동을 그룹 활동의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국내외 팬들은 "방탄소년단의 챕터2를 응원한다", "아미는 이것이 시작임을 기억하고 끝까지 기억할 것" 등의 반응을 보이며 이들의 결정을 지지했다.

사생활 통제, 방송 강행군…속으론 곪는다

방탄소년단이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하며 K팝 아이돌 육성 시스템의 병폐가 도마 위에 올랐다. 가요계 '톱 티어'인 이들 마저도 K팝 특유의 숙소 생활로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했다.

숙소 계약 만료 소식을 전한 RM은 "서운해할 분들이 있을 수 있지만 남자 7명이 같이 산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제이홉은 "냉정하게 각자의 공간이 생기며 좀 더 친해진 것 같다"고 했다. 이에 RM은 "우리는 친구라기보다 이제 가족"이라며 "팀 나이가 거의 서른인데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사생활을 서로 지켜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컴백 시기엔 분 단위로 쪼개진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하는 날이 대다수였다. 최근 방탄소년단은 '옛 투 컴'(Yet To Come)의 음악 프로그램 사전 녹화를 날밤을 새워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은 사전녹화 이후 위버스를 통해 "하루 밤새웠다고 몸살? 이게 나이를 먹는 건가"라고 털어놨다.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대부분이 기획사가 세운 혹독한 훈련을 받고 탄생한다. 이렇게 훈련받은 아이돌들은 데뷔한 후에도 경쟁적인 노동 환경에서 높은 압박감에 시달리며 육체적인 과부하뿐만 아니라 거식증, 공황장애 등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인기 그룹일수록 스케줄 강도는 더욱더 세다. 컴백을 하면 일주일 내내 음악 방송 스케줄을 뛰어야 하며 홍보를 위해 예능,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도 출연한다. 근래엔 인기 유튜브 채널이나 자체 콘텐츠에도 참여해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데뷔했다고 좋아할 시간이 없다.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며 육체적인 피로감과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불규칙한 식사, 수면 부족 등 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닛케이 아시아는 한국의 연습생 제도를 지적하며 "소속사들이 훈련 비용을 부담하면 이 비용은 데뷔 후 회수된다. 소속사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아티스트에게 빡빡한 스케줄을 강요한다. 방탄소년단의 공백은 양산형 아티스트 제작에 타격을 주고 너무 빨리 육성되고 소비되는 K팝 산업에 전환점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 뮤직

병역 문제도 큰 장애물…"BTS를 어떻게 하는가가 전례가 될 것"

방탄소년단의 결정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병역 문제까지 겹쳐있다. 그룹 내 맏형 진은 1992년생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입영 연기 추천을 받아 입영이 연기된 상태이나 올해 말까지는 입대해야 한다. 이어 1993년생인 슈가와 1994년생인 제이홉과 RM, 1995년생 뷔와 지민, 1997년생 정국도 연이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국위선양을 한 K팝 아이돌 등 연예인에도 병역특례를 부여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관측이다. 이러한 상황이 방탄소년단의 개별 활동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중론이다.

일본의 문화 칼럼니스트 마쓰타니 소이치로 씨는 신화,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등을 예로 들며 이들이 병역에 의해 인기가 저조해졌다며 방탄소년단의 병역 문제를 짚었다. 그는 "이번 발표는 분명히 여기까지 계속 달려온 결과이자 휴식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그 배경엔 임박한 큰 장애물이 있다"고 했다.

이어 "방탄소년단이 군 면제가 되지 않고 입대하게 된다면 완전체 활동은 적어도 5년간 할 수 없다"라며 "팬들은 바라는 것은 멤버 전원의 동시 입대지만 어쨌든 2~5년은 완전체 활동은 불가능해진다"고 내다봤다.

한국 국회와 사회가 소프트파워인 스타들에 대한 병역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가 소프트파워 정책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마쓰타니 씨는 "한국 연예계 및 한국 정부가 앞으로도 K팝의 글로벌 진출을 지향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번 방탄소년단에 대한 논의가 전례가 된다"라며 "(이번 병역법 논의는) 소프트 파워 정책에 있어서 국가적으로 어떤 합의를 얻는지, 혹은 얻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측정하는 지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방탄소년단의 선언에 K팝 시장을 넘어 세계 가요계도 큰 파장이 일었다. 미국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영국 BBC, 일본 요미우리 신문 등이 이들의 활동 중단 소식을 긴급히 타전했다.

뉴욕타임즈는 "방탄소년단 일곱 멤버에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의 결정은 국제적인 팝 스타로서의 삶에서 약간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솔로 활동에 집중하는 시간은 미래의 협업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팬들을 향해있다는 것으로 보였다"며 미국 음악 축제 롤라팔루자에 헤드라이너로 서는 제이홉이 그 첫 번째 주자라고 소개했다.방탄소년단은 새 앨범 '프루프'로 위상을 과시했다. 17일 기준 초동 판매량(발매 후 첫 일주일 판매량) 275만장을 넘긴 것이다. 이는 올해 발매된 앨범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이자, 방탄소년단의 역대 초동 기록 2위다. 또 팀 막내 정국은 미국 가수 찰리 푸스와의 협업곡 '레프트 앤드 라이트'(Left and Right)를 오는 24일 발매한다고 밝혔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