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ESG 또 하나의 유행어로 끝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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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유행 블루오션 전략블루오션 전략을 국내에 유행시킨 건 한국경제신문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기존 시장(레드오션)에서 벗어나 ‘가치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블루오션)을 창출하라는 블루오션 전략은 프랑스 인시아드대의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2004년 주창했다. 한경은 이듬해 ‘가치혁신연구소’를 만들고 블루오션의 개념을 국내에 전파했다. 필자도 취재팀의 일원으로 유럽에 날아가 이케아, JC데코 등 블루오션 창출에 성공한 기업을 취재하기도 했다.
마케팅에 쓰이며 유행어로 퇴색
ESG도 블루오션 전철 가능성
과도한 쏠림에 피로감 누적
ESG는 마케팅 수단 될 수 없어
이분법 대신 진지한 고민 필요
유창재 증권부 마켓인사이트 팀장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그야말로 블루오션 열풍이 불었다. 삼성전자 LG전자뿐 아니라 국내 웬만한 대기업은 모두 블루오션을 외쳤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는 한국 기업들의 특강 초청 1순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블루오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전략이 아니라 유행어가 돼버렸다. 가치혁신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기업들은 신사업이면 죄다 블루오션을 갖다 붙였다. 하다못해 새로 생긴 동네 노래방 이름에도 블루오션이 붙었다.급기야 2007년 남용 LG전자 당시 부회장은 블루오션 용어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블루오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략이지만 LG전자의 모든 전략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회사 안팎에선 블루오션을 핵심 경영 전략으로 삼았던 전임 김쌍수 부회장의 색깔을 지우기 위한 조치로 해석했다. 그렇게 서서히 블루오션은 철 지난 유행어가 돼갔다.결은 조금 다르지만 ESG(환경·사회·지배구조)도 블루오션의 전철을 밟는 느낌이다. 올해 초까지 모든 사업 계획에 ESG 딱지를 붙이던 기업들 사이에서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는데 언제적 ESG냐”는 말이 나온다. 국내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명복을 빕니다(RIP) ESG’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까지 내놨다.
ESG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04년이지만 투자업계와 기업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2018년께다. 핌코와 FT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전 세계 실적 설명회에서 ESG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업 비중은 1%에 불과했는데, 2018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20% 이상의 기업이 ESG를 언급했다. ‘ESG 스토리’를 붙이면 싸게 자금을 조달하고 높은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내 ESG 투자 비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맞춰야 하는 자산운용업계와 이해가 맞아떨어졌다.분위기가 바뀐 건 소위 ‘그린워싱’ 문제가 불거지면서다. 친환경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ESG 펀드라며 자금을 모집한 뒤 그렇지 않은 기업에 투자한 사례가 각국에서 적발됐다. 독일 도이치뱅크의 자산운용 자회사 DWS는 그린워싱 문제로 현지 경찰의 압수 수색을 받은 뒤 최고경영자(CEO)가 사임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최근 미국 1위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가 ESG 뮤추얼펀드를 판매하면서 투자자를 속였는지 조사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ESG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쟁의 위협이 현존하는데 방위 산업체를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이냐는 문제 제기가 대표적이다. 원유값이 치솟으면서 에너지 기업 주가가 오르자 ESG펀드의 매니저들은 일반 뮤추얼펀드에 비해 수익률이 저조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ESG에 대한 피로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포스코 계열의 화력발전 업체인 삼척블루파워는 최근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AA-의 신용등급에도 불구하고 기관들로부터 단 한 건의 주문도 받지 못했다. 그 덕분에 개인투자자들이 안정적인 회사에 금리 연 5.65%를 받고 투자할 기회를 얻었지만, ESG가 ‘필요한 곳에 돈이 흐르게 하는’ 자본시장의 역할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SG가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다.그러는 사이 ESG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기업들의 가치는 과도하게 올랐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兆) 단위 인수합병(M&A)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폐기물 처리 업계가 대표적이다. ESG 찬성론자들은 “일부 부작용이 있지만 ESG 투자가 주류가 되면서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과도함에 대한 반발과 피로감 때문에 ESG가 블루오션처럼 또 하나의 유행어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우려다.
지금도 어떤 기업들은 가치혁신을 통해 경쟁 없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블루오션이라는 용어를 마케팅으로 쓰는 대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회사들이다. ESG는 마케팅 용어가 아니다. 일부 기업의 ‘주가 부풀리기’에 사용돼서도 안 된다. 지속가능경영, 지속가능투자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허심탄회한 대화만이 ESG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