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In] "기본권 지켜달라"…사법 판단 대상 된 기후위기 대응

정부 등 상대로 한 '기후소송' 1986~2021년 전세계 1천841건
국내 관련 헌법소원 2년 넘게 심리 중…'아기 기후소송'도 제기
"저에게는 기본권이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른들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크면 너무 늦습니다. 우리한테 떠넘기지 마세요.

바로 지금, 탄소배출을 훨씬 많이 줄여야 합니다.

"
지난 13일,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태아를 포함해 5세 이하 영·유아를 주요 청구인으로 한 이른바 '아기 기후소송'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가 헌법재판소에 제출됐다.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2018년 대비 40%로 잡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 시행령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목표치를 설정한 탓에, 앞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가야 할 아기들이 기후변화에 따른 기본권 침해를 받을 우려가 크므로 위헌이라는 취지다.

국내에서는 이런 '기후 소송'이 시작 단계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20여년 전부터 기후변화의 영향을 쟁점으로 한 소송이 여러 국가에서 제기돼 왔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관한 인식이 날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정부 등 기후변화 대응 주체의 책임을 사법적으로 따지는 움직임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 "기후변화 대응은 기본권 문제"…각국서 잇따르는 기후 소송
기후 소송은 정부나 기업 등을 상대로 기후변화 대응 노력 강화를 촉구하거나, 기후와 관련된 각종 재난으로 입은 손실 보상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

온실가스 감축 등 정책 시행으로 경영상 불이익이 발생했다며 기업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시민 개개인이나 시민단체 등이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며 제기하는 소송이며, 통상 알려진 기후 소송도 이런 사례들이다.

승소 여부뿐 아니라 소송이라는 행위 자체로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책 변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전략적 소송'으로 일컫기도 한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그랜섬 기후변화환경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부터 지난해 5월31일까지 각국에서 제기된 기후 소송은 1천841건이다.

미국이 1천387건으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며, 호주(115건), 영국(73건), 유럽연합(58건) 등도 많은 편에 속한다.

최근에는 온실가스 감축 등 기후변화 대응이 국민 보호를 위한 국가의 의무이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생명권, 건강권 등 국민 기본권이 침해당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소송이 느는 추세다.

외국에서는 이미 의미있는 판례가 나오고 있다.

2015년 네덜란드 법원이 자국 정부에 기후변화 대응을 강화하라고 판결한 '우르헨다(Urgenda) 소송'은 기후 소송 역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힌다.

우르헨다 소송은 2013년 네덜란드 환경단체 우르헨다 재단이 자국민 약 900명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아 국민이 생존권을 위협받는다는 취지였고, 법원은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여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치를 강화하라고 정부에 명령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결국 2019년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다.

이 사건은 기후변화 대응이 정부 책임임을 법원이 인정한 세계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을 비롯해 기후 소송을 진행하는 각국 환경단체와 시민들에게 중요한 참고사례가 되기도 한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특정 법령이 부실하거나 불충분해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헌법소원 등 위헌소송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독일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기후변화대응법에 담긴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하다며 일부 위헌으로 결정했다.

온실가스 감축은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부분과 연계돼 있는데, 해당 법 규정은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2030년 이후로 미뤄 자유권을 잠재적으로 침해하므로 헌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였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도 정부가 탄소배출 감축 계획과 파리기후협약 등을 지키지 않았다며 환경단체들이 낸 소송에서 법원이 정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원고인 환경단체들이 상징적 차원에서 정부에 배상금 1유로를 청구한 사건이라 '1유로 소송'으로 알려지며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도 최근 제기된 '아기 기후소송'을 포함해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과 헌법상 기본권을 연관 지은 헌법소원 청구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20년 청소년 환경단체 '청소년기후행동'은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과 시행령에 명시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 등 일부 내용이 기후변화로부터 청소년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기에 크게 부족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 단체는 이후 제정된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서도 유사한 취지로 올 2월 헌법소원을 냈다.

지난해에도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들과 일부 정당이 탄소중립기본법에 명시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생명권 등 기본권을 보호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며 역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 "기후 소송, 특수성 때문에 과거 법리 고수할 사안 아냐"
이처럼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과 국민 기본권을 연관 짓는 기후 소송은 기존의 다른 기본권 관련 소송과는 결이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반적인 기본권 소송에서는 어떤 권리가 현재 침해되고 있거나 향후 침해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기후변화 자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현상일지라도 이에 대한 정부 대응이 해당 소송을 제기한 특정인들의 권리 침해와 직접 인과관계를 형성하는지는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 이와 같은 사건에서 정부 측은 자신들이 각종 정책 등을 통해 현실 대응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설령 관련 법령이 다소 미비하더라도 이 때문에 청구인들에게 앞으로 어떤 기본권 침해가 구체적으로 발생할지는 예상하기 어려우므로 청구가 기각돼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일각에서는 기후변화라는 사태의 스케일과 시급성 등을 고려하면 전통적 법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종전과는 다른 법리 해석과 사법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후위기의 특수성은 전통적 법 논리에서 다루는 인과관계와는 달라 과거 법리를 고수할 사안이 아니며 다른 나라의 대응과 비교해보는 접근법도 필요하다"면서 "기후위기는 결국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어느 순간 갑자기 재앙처럼 찾아온다는 점을 법리적으로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가 전 지구적 현상이고, 우르헨다 소송을 비롯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외국 사례가 여럿 축적된 만큼 한국 헌재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심리할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기후행동의 헌법소원을 맡은 윤세종 변호사는 "2020년 헌법소원 제기 이후 탄소중립기본법이 제정되고 NDC가 상향되는 등 입법과 행정이 나름대로 다음 단계의 해법을 내놓은 셈"이라며 "그러나 새로운 목표들도 기본권 보호에는 현저히 부족한 게 사실이고, 이런 정치적 실패가 반복되고 있으니 사법부가 국민 기본권 범위의 마지노선을 판단해주는 게 삼권분립 구도에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감수성이 높아지는 추세인 만큼 기후 소송은 일반적인 재판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 기후변화 대응 비영리법인 기후솔루션에서 활동하는 하지현 변호사는 "꼭 법정 소송이 아니더라도 특정 기업의 친환경 광고가 과장광고로 보인다면 이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는 등 시민들이나 단체, 법률가들이 국내 현실에 맞는 다양한 법·제도적 접근법을 개발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