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잊은 나라엔 평화 없어"…한국에 묻힌 加노병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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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은 전쟁' 6·256·25전쟁 72주년을 나흘 앞둔 2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캐나다 참전용사 존 로버트 코미어의 유해가 도착했다. 전날 저녁 인천공항에 도착한 유해는 이날 유족 대표에 의해 참전용사 사후안장 묘역에 안장됐다. 폴 라카메라 유엔군 사령관의 추모사에 이어 여섯 발의 조총(弔銃)과 진혼나팔 소리가 애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70년 전 전투 현장의 포성이 오버랩됐다.
가평전투 중공군 막은 코미어
어제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
"이제는 대한민국이 모십니다"
하버드 박사 때 참전 윌리엄 쇼
최전방의 '피아노 거장' 번스틴
고아 1천명 살린 중령도 '뭉클'
고두현 논설위원
코미어는 1952년 19세에 참전했다. 당시 한국은 극빈국이었다. 전 국토가 만신창이였다. 그 폐허의 땅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이 잿더미 위에서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봤다. 은퇴 후 요양원에서 노후를 보내면서도 기적 같은 한국의 변신을 자주 언급했다.그럴 때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거듭했다. 지난해 말 90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한국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엔기념공원 사후안장 묘지에 묻힌 열네 번째 참전용사가 됐다. 이곳에는 6·25전쟁 때 전사한 11개국 병사의 묘 2314기가 안장돼 있다.
현대차 딜러가 찾아준 묘지
그가 묻힌 묘역 인근에는 캐나다 병사 378명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휴전을 석 달 앞둔 1953년 4월 20세에 전사한 로이 더글러스 엘리엇의 묘도 있다. 캐나다에 있는 가족들은 그의 전사 소식을 알고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덤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현대자동차 매장을 찾은 동생 도널드 엘리엇이 한국 판매원 신상묵 씨에게 형 얘기를 털어놨다.사연을 들은 신씨는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유엔기념공원 홈페이지에서 이름을 찾았다. 묘비 사진을 내려받은 그는 곧바로 사진을 현상해 액자에 넣었다. 그날 오후 차를 찾으러 온 엘리엇은 액자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한 엘리엇은 꿈에 그리던 형의 묘비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캐나다의 6·25 참전용사는 모두 2만6791명. 그중 516명이 전사하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 이들은 가평전투에서 13배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가평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 자국의 위니펙 기지 이름을 ‘가평’이라고 지었다. 최근엔 나이아가라시에 한글과 영문으로 가평전투승전비도 세웠다.
미국은 전사자만 3만6595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들이 흘린 피는 자유와 번영의 자양분이 됐다. 이 가운데 4대에 걸쳐 한국에 뼈를 묻은 윌리엄 쇼 가문의 헌신을 잊을 수 없다. 1950년 9월 서울수복작전 때 녹번리에서 29세에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선교사로 와 목원대를 설립한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이다.
'代를 이은 한국 사랑' 애틋
평양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미국 웰즐리대 졸업 후 2차대전에 참전했고, 한국에서 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대 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가 터지자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긴 채 재입대했다. 만류하는 이들에게는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라며 짐가방을 쌌다.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그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 속에서도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도 한국에서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다. 대를 이은 한국 사랑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은평평화공원에 그의 동상과 기념비가 있고, 무덤은 양화진에 있다.또 한 사람. 전차 한 대로 적 500명을 물리친 어니스트 코우마 상사는 ‘낙동강 전투의 영웅’이다. 1950년 8월 31일 밤, 그는 부하 4명과 함께 전차 안에서 물밀듯이 몰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9시간 동안 싸웠다.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는 적에게 포를 발사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포탄과 총탄이 떨어지자 권총과 수류탄을 던지며 사투를 벌였다. 전차 위로 올라온 적군은 포탑과 포신으로 돌려치며 떨어뜨렸다. 철야전투 후 정신을 차려보니 적군 시체 250여 구가 널려 있었다.
전쟁고아 1000여 명을 구한 사연도 가슴 뭉클하다. 미 공군 군목(軍牧)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서울에서 고아 1000여 명을 돌보다가 1950년 12월 황급히 후퇴해야 했다. 이동 수단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는 공군 조종사인 딘 헤스 대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오키나와기지에 있는 수송기 16대를 보낼 테니 내일 아침 8시까지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데려오라”는 말을 듣고는 시멘트 하역용 미군 트럭 14대를 동원해 고아들을 제주도로 탈출시킬 수 있었다.
전장을 수놓은 피아노 선율
‘유모차 공수작전’으로 불린 이 일로 그는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란 별칭을 얻었지만 이 때문에 군법회의에 회부돼 곤욕을 치렀다. 이는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Battle Hymn)’로 만들어졌다. 이때의 ‘유모차 공수작전’은 사흘 뒤 ‘흥남 철수작전’과 함께 6·25의 양대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꼽힌다.‘피아노의 거장’ 시모어 번스틴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피아노였다. 그는 현을 수직으로 만들어 크기를 줄인 업 라이트 피아노를 언덕 밑에 놓고 연주했다. 군인들은 언덕에 앉아 관람했고, 초병은 적의 포격에 대비해 공연장을 방어했다. 이런 최전방 공연을 100회 넘게 했다.
2016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옛 전우들을 위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했다. 이어 “참혹한 상흔을 딛고 눈부신 번영을 일궈낸 한국인을 위해 바친다”며 밝고 희망적인 브람스의 인터메조 A장조를 선사했다. 객석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올해 95세인 그는 전쟁 중에 기록한 일기장을 아직도 간직하며 70여 년 전 그때를 떠올린다고 한다.매년 이맘때만 전쟁을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예부터 전쟁의 참상을 잊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다. 로마 병법서나 중국 책략서도 모두 그렇게 강조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병법서 《사마법(司馬法)》 또한 “나라가 강대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며, 나라가 평안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이번 주말엔 양화진이나 은평평화공원에 들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