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 베를리오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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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가 만든 '환상 교향곡'입니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죠. 이 작품은 우리가 평소 익숙하게 듣던 베토벤, 브람스 등의 교향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인지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곡엔 파격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던 한 예술가가 자살을 시도한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약이 치사량에 미치지 못해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다양한 환상들을 보게 됩니다. 비극적인 사랑의 끝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라니, 슬프기도 하고 살짝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환상 교향곡은 실제 베를리오즈가 짝사랑의 아픔을 가득 담아 만든 작품입니다. 그는 잘 나가던 여배우를 흠모하던 무명 작곡가였죠. 과연 이 사랑은 어떻게 됐을까요. 베를리오즈의 사랑 이야기와 음악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게 했는데요. 의사가 되길 원해 관련 지식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음악도 아버지로부터 배웠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다른 과목에 비해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기타와 플루트를 가볍게 익힌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훗날 음악가가 되어서도 피아노를 제대로 칠 줄 몰라 고충을 겪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아버지의 뜻대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부를 하러 가면 늘 구토를 하거나 기절을 했죠. 힘들어하던 베를리오즈를 위로해준 건 음악이었습니다. 그는 파리 곳곳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녔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음악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들에게 큰 기대를 했던 아버지는 재정적 지원까지 끊으며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를리오즈의 음악 인생은 쉽게 풀리는듯 했습니다. 처음으로 연 '비밀 재판관', '웨이벌리' 서곡 공연이 호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일 돈을 잃어버렸는데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대상에도 도전했습니다. 당시 로마대상을 차지하면 음악가로서 출세길이 보장되다시피 했죠. 그는 4번의 도전 끝에 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조이스 디도나토가 부른 '파우스트의 겁벌' 중 '뜨거운 사랑의 불꽃'. 베를린필하모닉 유튜브 채널 베를리오즈는 '표제음악'을 다수 만든 음악가로도 유명합니다. 표제음악은 문학이나 연극처럼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고, 제목 등에도 이런 특성이 잘 담긴 음악을 의미합니다. 평소 문학, 오페라와 연극 등을 좋아했던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 음악에 녹여냈습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은 매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통적인 구성과 악기 편성을 잘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표출했기 때문이죠. 소설이나 연극처럼 작품 곳곳에 극적인 변화를 시도해 청중들을 자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새롭긴 하지만 예측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베를리오즈는 사랑에 있어서도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인물이었습니다. 24살엔 연극 '햄릿'을 보고 나선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는 수십 통에 달하는 러브레터를 보내며 적극적인 구애를 했습니다. 하지만 스미드슨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죠. 베를리오즈는 그 슬프고 비참한 기분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환상 교향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26살엔 피아니스트였던 마리 카미유 모크를 만나 약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혼녀가 돌연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리자, 그는 두 사람을 죽이려 권총을 들고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간에 복수를 포기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베를리오즈가 사랑에 맹목적일 뿐만 아니라, 때론 충동적이기도 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베를리오즈는 과거에 짝사랑했던 스미드슨과 우연히 재회하게 됐습니다. 당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과거 잘 나가던 스미드슨의 인기는 시들해져 버렸죠. 베를리오즈는 그런 그녀를 음악회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었던 '환상 교향곡'을 들려줬습니다. 이번엔 스미드슨이 그의 마음을 받아줬고,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스미드슨은 설 무대를 잃어가는 것에 크게 슬퍼했고,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아내를 돌보느라 지쳐갔고, 그러다 마리 레시오라는 가수와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베를리오즈는 결국 스미드슨과 헤어지고 레시오와 재혼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미드슨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주고 아플 때에도 보살폈다고 합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오페라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페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작곡했습니다. '파우스트의 겁벌' '벤베누트 첼리니' '트로이 사람들' 등을 잇달아 발표했죠. 자신을 음악 세계로 인도했던 오페라에 끝까지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크게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재정적 위기도 종종 겪었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유럽 전역에 연주 여행을 다니며 돈을 벌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죽음에 이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첫째 아내, 둘째 아내, 그리고 첫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까지 전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연이어 잃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후 고통을 떨쳐내기 위해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갔지만,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베를리오즈를 살게 했던 것도, 죽게 한 것도 사랑이었던 셈이죠.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고, 매 순간 진심으로 마음을 다했기에 '환상 교향곡' 같은 명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