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소비가 달라졌다…입는 건 명품, 먹는 건 최저가

인플레에 유통가 '지각변동'

마트선 값싼 할인 제품만 담아
월마트·타깃 안팔린 재고 '눈덩이'
"재고떨이…출혈경쟁 부를 수도"

백화점 북적…럭셔리 매출 늘고
헬스장·극장 서비스업도 기지개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미국인의 소비 패턴이 양극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치품은 가격이 더 올라도 구매하는(트레이딩 업) 반면 식자재 등 생활필수품은 되도록 싼 제품을 선택(트레이딩 다운)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로 소매유통기업들의 희비도 엇갈리고 있다.

뚜렷해지는 ‘소비 양극화’

23일(현지시간) 데이터 제공업체 센티에오에 따르면 미국 소매유통업계에서 최근 ‘트레이딩 다운’이 화두로 떠올랐다. 트레이딩 다운이란 소비자들이 당장 필요하지 않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제품에 대해 보이는 저가 구매 성향을 뜻한다. 의류, 가전제품 등 ‘당분간 구매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품목들에 대해선 아예 지갑을 닫기도 한다.

지난 1분기 기업들의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트레이딩 다운이 언급된 횟수가 120건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소비 지출이 쪼그라들었던 2009년의 약 70건을 훨씬 넘어섰다. 미국의 올 5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기에 비해 8.6% 증가하는 등 물가가 40여 년 만에 최악의 수준으로 치솟자 ‘알뜰 소비’를 선택하고 있다.

반면 명품 등 고가 제품에서는 ‘트레이딩 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 백화점 체인업체 콜스는 “일부 쇼핑객이 더 저렴한 상품을 찾는 와중에도 럭셔리 제품 매출은 계속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이 평범한 품질로 중간 가격대의 제품을 제공해서는 생존이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컨설팅펌 EY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소매 부문에서 양극단의 제품이 중간 제품의 판매량을 점점 능가하게 될 것”이라며 “소매유통사로선 확실한 전략을 마련해야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포스트코로나도 소비 성향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집에만 있느라 ‘재화’를 사들였던 미국인들이 일상회복이 이뤄짐에 따라 이젠 집 밖에 나가 영화관 등 ‘서비스’ 소비를 늘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TV, 러닝머신 등의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다.

기업 성적표도 엇갈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미국인의 소비 패턴이 급변하면서 소매유통업계의 지각변동이 시작됐다”며 “변화의 흐름을 잘 읽고 제대로 대처한 기업들이 승자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식료품 체인점 크로거는 지난 16일 “1분기 PB(자체상표) 식료품 브랜드 매출이 직전 분기보다 6.3% 늘어나 전체 매출 증가율을 압도했다”며 “소비자들이 값싼 상품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발표했다. PB 식료품 제조사인 트리하우스푸즈도 “소비자들의 새로운 가치 추구 분위기 덕분에 1분기 매출이 월가 전망치를 웃돌았다”고 했다.반면 타깃, 월마트 등은 씁쓸한 성적표를 공개했다. 월마트는 “소비자들이 1갤런짜리 우유, 고급브랜드 베이컨이 아니라 하프갤런 우유, PB브랜드 베이컨을 선호하기 시작했다”며 수요 예측에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코로나19 시국에 맞춰 대량으로 확보해둔 평상복, 잠옷, 식기 등이 포스트코로나로 팔리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재고가 크게 늘어나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타깃과 월마트의 지난 1분기 재고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3%, 33% 증가했다.

결국 타깃은 대규모 할인 판매를 통해 재고떨이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여름 휴가철 내로 어떻게든 재고를 처분해야 하반기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재고떨이를 위한 소매유통업계의 출혈경쟁이 곧 피바다를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재고 관리에 실패한 기업들이 시장의 변동성을 높이고 결국엔 경기 후퇴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 1980년대 중반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세계 경제가 누린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는 기업들이 재고 주기를 줄인 덕분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대안정기는 인플레이션, 산출량 등 거시변수의 변동성이 크게 감소하면서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