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 "사람의 매력은 진정성에서 나와…난 거짓말로 가사 쓴 적 없다"

한경 인터뷰 - 데뷔 46주년 맞은 '낭만가객' 최백호
만난 사람 = 조일훈 논설실장

59살에 시작한 그림 주로 나무 그려…가수 겸 화가로 남고 싶다
'낭만에 대하여' 인기 비결, 듣는 사람이 함께 늙어가기 때문 아닐까
노랫말 감성 원천은 고향 부산과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독서습관
40, 50대 때보다 목소리 힘 더 좋은 건 꾸준한 트레이닝 덕분
가수 최백호가 인기 작가 콰야와 함께 2인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에 대하여’를 열고 있는 경기 화성의 롯데백화점 동탄점 내 갤러리에서 뒤늦게 붓을 잡게 된 이유와 화가로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예술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 장르는 다를 수 있지만 근원과 방식은 같다. 예술가 스스로 무의식 어딘가에 침전된 감정들을 치열하게 찾아 헤맨 후 수면 위로 한껏 끌어올린다. 그 형태가 때론 귓가를 적시는 선율과 가사로, 때론 시선을 사로잡는 이미지와 색감으로 나타날 뿐이다. 올해로 데뷔 46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72)에게도 음악과 미술은 연결된다. 최백호를 만난 건 녹음실이나 콘서트장이 아니라 갤러리에서였다. 그는 경기 화성에 있는 롯데백화점 동탄점 갤러리에서 다음달 10일까지 작가 콰야와 함께 전시를 연다.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전시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하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그림은 음악과 닮았다.

최백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도 반짝이지만 쓸쓸하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영원을 꿈꾸게 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게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의 꿈도 둘이자 하나다. 그는 작품들을 하나씩 친절히 설명해 주며 “가수 겸 화가 최백호로 불리고, 남고 싶다”고 했다. 최백호의 음악에 이어 그림과 마주하며 깨달았다. 한 잔의 ‘도라지 위스키’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낭만에 대하여, 그는 끈질기게 천착하고 끌어올리고 있었음을.▷미술에 원래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사실 가수가 될 줄은 몰랐어요. 어머니가 교편을 잡으셔서 저도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오랜 기간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언젠가 때가 되면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59살에서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할 땐 항상 긴장하는 편인데, 그림을 그릴 땐 완전한 휴식을 취하게 되는 느낌이에요.”

▷나무 그림이 많습니다.“갤러리 안쪽에 어머니와 함께 살았을 때 있었던 나무 사진이 있는데요. 그 나무를 보며 어린 시절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맨 처음 그린 그림도 나무 그림이었죠. 지금까지 2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너무 나무만 그린 것 같아요.(웃음) 요즘엔 좀 더 추상적인 작품들도 그리고 있습니다.”

▷미술 팬들도 좀 있으신가요.

“젊은 분 중에는 제가 가수인 줄 모르고 작품을 구매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대개는 많은 분이 ‘가수가 그린 그림이니까’ 하고 더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림만으로도 더 좋아해 주실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겠죠.”▷‘백호’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입니까.

“흰 백(白), 범 호(虎)를 썼고 ‘백호 같은 사람이 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름이 셉니다. 제가 태어나고 다섯 달 만에 아버지(대한민국 2대 국회의원 최원봉)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와 어르신들은 제 이름이 세서 그렇게 됐다고들 하셨어요. 어렸을 땐 제 이름이 싫었죠.”

▷화가를 꿈꾸다 갑자기 가수가 된 계기가 있나요.“스무 살에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충격 때문에 멍한 상태로 살았어요. 꿈을 지닌다거나 ‘어떻게든 잘살아 봐야지’ 이런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어요. 군에 가서도 폐병으로 1년 만에 나오게 됐습니다. 그러다 친한 친구의 매형이 부산에 라이브홀을 하게 돼서 거기서 노래를 부르게 됐습니다. 악보도 잘 보지 못했고, 기타도 아주 초보 수준이었죠. 그저 생계를 위해 매일 노래하고 매일 돈을 받아 살아가는 데 급급했습니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부터 많이 알려졌습니다.

“첫 앨범이 잘 됐지만 오랫동안 생활인으로서 고단하게 살았어요. 원래는 업소에 가지 않았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 현실이 크게 다가오니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7개 일정을 뛴 날도 있었어요. 1990년엔 DJ를 하러 미국에 가기도 했는데, 1년 만에 방송사가 망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낭만에 대하여’가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95년에 발매했는데, 그 노래도 처음엔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다 1996년 추석 때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노래가 나오면서 갑자기 터졌습니다. 발표 후 1년 반 동안 팔았던 앨범 판매량과 하루 만에 판 앨범 판매량이 거의 비슷했을 정도예요. 그렇게 추석 때부터 시작돼 25만 장이 나갔어요. 사실 노랫말 자체가 낭만적이진 않은데, 많은 공감을 얻은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죠. 아마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나처럼 늙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직접 작사하신 노랫말들엔 아주 미묘한 감성이 담겨 있습니다.

“바닷가인 부산에서 나고 자란 덕분입니다. 환경이 참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유럽에 가면 화가들의 아름다운 감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잘 알 수 있죠. 책도 많이 봅니다. 특정한 방향은 없어요.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봅니다. 만화도 지금까지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지식도 감성도 꾸준히 벼렸다고 할 수 있네요.

“저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저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해요. 매일 새벽 6시 반쯤 일어나서 2~3시간씩 노래 부르고 그림을 그려요.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도 14년째 하고 있습니다. ”

▷나이가 드시면서 오히려 목소리의 힘이 좋아지고 깊어졌습니다.

“40~50대보다 확실히 목소리가 더 좋아지고, 호흡도 길어졌어요. 꾸준히 트레이닝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90살까지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가수들의 가창력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잘합니다. 과거에 비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서 레벨 업이 됐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해서 재미가 없고, 매력이 없습니다. 테크닉은 정말 좋은데 다 비슷해요. 나훈아, 조용필, 송창식 등의 목소리는 들으면 누군지 딱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노래하는 애들한테 가창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교수가 가르친 것밖에 하지 못하고 호흡도 똑같아집니다. ”

▷한국 음악시장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좋아지고 외형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엔 아직도 제대로 된 녹음실이 없어요.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지원이 이뤄져야 합니다.”

▷고단한 청춘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인생은 성공과 실패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우선적으로 좋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 힘은 진정성에서 나오죠. 저는 진정성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가사도 거짓말로 써본 적이 없어요. 전부 제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씁니다. 진정성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나간다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주름잡힌 그의 목소리

“선생님 노래를 듣고 정말 많이 위로받았어요.”

방탄소년단 뷔가 지난 2월 팬들에게 한 곡을 추천하며 이같이 말했다. 최백호 씨가 부른 ‘바다 끝’(2017)이란 노래다. 뷔의 추천과 함께 ‘바다 끝’은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 검색어 1위에 오르며 큰 인기를 얻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오래되고 낡은 것은 소외되는 법이다. 그런데 최백호의 주름 잡힌 목소리, 세월의 흔적이 가득 내려앉은 노래는 어쩐 일인지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있다.

특히 그는 후배 가수들의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아이유는 2013년 자신의 앨범에 들어갈 ‘아이야 나랑 걷자’란 노래를 최백호와 함께 불렀다. 린, 에코브릿지,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도 그와 함께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했다. 닮고 싶은 선배 가수로도 꼽힌다. 김호중은 “최백호 선생님은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가수”라며 “선생님처럼 나중에 음악을 그만두는 날까지 ‘저 사람 노래하는 사람이지’라고 불리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최백호의 음악은 영화, 드라마의 OST로도 자주 활용되고 있다. ‘바다 끝’은 영화 ‘자산어보’와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 나왔다. ‘The Night’란 노래는 JTBC 드라마 ‘괴물’의 OST로 쓰였다. 이 덕분에 대중도 그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고 있다. ‘부산에 가면’은 2013년 노래지만,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잊혀지지 않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최백호는 “가수로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가수들과 호흡하면서 제가 오히려 배웁니다. 덕분에 젊은 작곡가분들도 자신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많이 요청해 주는 것 같아요. ‘부산에 가면’도 중년들은 오히려 모르는데 젊은 분이 많이 아셔서 신기합니다.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죠.”

정리=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