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여행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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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훈 법무법인 율촌 대표 변호사 shkang@yulchon.com프랑스 파리의 소매치기는 악명이 높다. 몇 년 전 이곳을 방문한 나 역시 이들의 목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휴대폰을 날치기당했다.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업무를 보던 터라 참으로 난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업무는 봤지만 휴대폰이 없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반전이 왔다. 휴대폰이 사라지니 당장 업무의 긴장감에서 해방됐다. 이메일을 볼 수 없으니 주위 사람들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고,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오롯이 내 눈에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묘한 해방감과 색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의외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묘미일 것이다.
나는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법관 연수 어학 과정을 마치고 방학 기간에 캐나다에 사는 작은집을 방문했다. 이왕 캐나다에 온 김에 관광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족과 함께 로키산맥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었고 내비게이션도 없어서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었다. 로키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밴프국립공원에 있는 ‘레이크 루이스’의 멋진 호텔에서 우아하게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당시 호주머니 사정 때문에 다른 관광객들이 여유 있게 즐기는 것만 구경하고 왔다. 다음에 꼭 다시 와 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 후 20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방문했고 멋진 호텔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서 우아한 식사를 즐길 수 있었지만, 뭔가 조금 아쉬웠다.불편한 숙박과 값싼 음식 등으로 고생하면서 어렵게 여행했을 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아, 여행의 맛은 내 마음속에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코로나가 풀리면서 움츠렸던 여행 본능이 점점 깨어나고 있다. 여행사, 여행 앱 광고가 봇물이고, 여행용 가방 매출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반갑기까지 하다. 다들 어찌나 부지런한지 웬만한 곳은 비행기며 숙박이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디로든 떠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설렌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하는 시간이자, 현실에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행복심리학을 연구하는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여행은 행복을 주는 최고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행복감을 강하게 주는 활동에 걷기, 놀기, 말하기, 먹기가 있는데 여행에는 이 네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여행 한 가지 했을 뿐인데, 행복의 충분조건이 다 들어 있다니, 얼마나 알짜배기 활동인가.
멀리 떠나야만 여행이 아니다. 누군가 정해 놓은 ‘가봐야 할 곳’을 정복하듯이 찾아가서 인증샷을 찍어대는 것은 내 스타일도 아니다. 느긋이 한 공간에 머무르며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 저녁에는 손에서 일을 놓고 가볍게 산책을 나서 볼 요량이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말을 걸어보고, 동네 책방에 들러 가벼운 시집 한 권도 사고, 어제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집 앞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향긋한 꽃차를 마셔보려고 한다. 국내외 온통 우울한 소식이 가득하지만, 여행은 마음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다.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나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