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위 자리 뺏길 각오까지 했다"…이건희 닮은 이재용의 '결단' [강경주의 IT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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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56회
정공법 뒤집고 '초격차' 시작
이건희, 트렌치 대신 스택 선택…메모리 초격차 시작
이재용, 핀펫 대신 GAA 승부수…세계 최초 3나노 양산
"파운드리 2위 자리 뺏길 각오까지 하고 도전 감행"
"스택(stack) 방식이 맞을 것이라는 감은 있었지만 나 자신도 100% 확신은 못한 상태였다."삼성전자 40년 역사를 담은 사사(社史) '도전과 창조의 유산'에는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반도체 D램 신공정 도입을 앞두고 고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그의 결단은 도시바 등 일본 반도체 기업을 제치고 훗날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최강자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순간이 됐다.
35년이 지난 지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기존 기술을 뒤집는 모험을 감행해 선친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다. 파운드리 1위 대만 TSMC를 제압할 무기로 차세대 기술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Gate-All-Around) 공정을 선제 도입해 세계 최초 3나노 초도 양산에 성공하면서다.
반도체서 삼성 미래 본 이건희 회장
지난달 30일 삼성전자가 GAA 공정 기반 3나노 양산에 성공하자 이 회사 출신 관계자들은 과거 이 회장 시절 신공정으로 D램 독자 개발에 성공했던 일화를 회상했다.반도체를 본격적으로 키우기로 마음 먹은 이 회장은 1983년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도시바에 기술료를 지불하고 삼성전자 엔지니어를 파견했다. 하지만 기술 습득은커녕 유출을 우려한 현지 인력들이 심한 텃세에 이렇다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특히 당시 반도체를 장악한 도시바, 히다치, 일본전기,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은 삼성전자를 대놓고 무시하며 "만약 삼성전자가 64K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며 비웃기까지 했다.하지만 삼성전자는 굴하지 않고 기존에 보유한 반도체 개발 인력에 국내 우수한 전자 인력까지 보강해 64K D램 개발에 고삐를 죘다. 이 회장은 "반도체는 타이밍 싸움이 중요하다"는 경영 가치를 앞세워 속도를 높였다. 삼성전자는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83년 12월1일,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성공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은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다. 여러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현장은 삼성인들의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이 6년 만에 성공한 반도체 개발을 삼성전자는 6개월 만에 해낸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여세를 몰아 1983년 말 256K D램 개발에 착수해 7개월여 만에 제품 양산에 성공, 또 한 번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을 놀라게 만든다. 256K D램은 삼성전자 매출의 첫 효자 상품으로 등극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최고 인기 제품이 됐다.
스택과 트렌치 선택의 갈림길…이건희 선택은
이후 삼성전자는 미국 반도체 회사에 근무 중이었던 진대제 박사(이후 삼성전자 대표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역임)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다. 1986년에는 1M D램 개발에 성공하고 4M D램, 16M D램을 병행 개발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그러다 1987년 삼성 반도체에 중요한 결정적 순간이 다가온다. 그해 4M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이 회장은 메모리반도체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지, '트렌치(trench)'로 할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기존 반도체 기업들의 트렌치(밑으로 파내려 가는 기술)는 안전했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다. 스택(회로를 고층으로 쌓아올리는 기술)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 확보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수율 확보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다.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신공정 앞에 미국과 일본 업체도 선뜻 스택을 채택하지 못했다.진대제·권오현 박사는 이 회장에게 "트렌치는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다"며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하다. 이 점이 핵심 차이"라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이 고심을 거듭할 때 미국과 일본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기존 공정인 트렌치를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부 혼란은 더 커졌고 삼성전자도 트렌치를 따라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과감히 스택 공정을 지시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결과적으로 이 회장의 결단은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트렌치 방식을 사용한 일본 도시바는 생산성 저하로 D램 부문 경쟁력을 완전히 잃었다. 도시바뿐 아니라 트렌치 방식을 선택한 타 업체들도 대량 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치명적 수율 하락을 경험했다. 반면 탄력을 받은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비트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고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1위에 등극하는 기적을 썼다. 반도체 사업 진출 10년 만이다.
훗날 삼성전자 40년 역사를 담은 사사(社史) '도전과 창조의 유산'에서 이 전 회장은 "스택 방식이 맞을 것이라는 감은 있었지만 나 자신도 100% 확신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파운드리 기존 공정 뒤집은 'GAA로 3나노 양산' 성공
이재용 부회장은 비메모리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하지만 파운드리 선두 업체인 TSMC의 점유율이 워낙 압도적이고 수율도 안정적인 탓에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 5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 그는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고, 삼성전자는 지난달 30일 파운드리에서 한 번도 도입된 적 없는 GAA 신공정을 채택해 세계 최초로 3나노 초도 양산에 성공했다.반도체 회로 선폭을 의미하는 3나노는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 특히 GAA 신공정은 미세화에 따른 트랜지스터의 성능 저하를 줄이고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어 기존 핀펫(FinFET) 기술에서 한 단계 진보된 차세대 반도체 핵심 기술로 손꼽힌다.현재 공정에서는 반도체 크기가 계속 작아지면서 전류 제어 한계에 봉착했다. 전류 제어 역할을 하는 게이트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누설 전류가 생기면서 전력 효율이 떨어지는 탓이다. 반면 GAA 구조에서는 전류 흐름을 보다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는 만큼 전력 효율이 보다 개선될 수 있다. 핀펫은 전류가 흐르는 채널이 3개면이었지만 GAA는 모든 면에서 전류가 흐르는 구조여서 트랜지스터 사이즈가 작아진다. 궁극적으로 반도체를 더 소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핵심 관계자는 "논문과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GAA를 삼성이 과감하게 먼저 시도를 한 것이다. 당연히 실패 가능성이 높았고 사내 반대 여론도 컸지만 기존 공정으로는 TSMC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며 "파운드리 2위 자리를 뺏길 각오까지 하고 도전했다. 양산에 성공했으니 수율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재계 관계자는 "GAA는 TSMC도 못하고 있는 거다.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삼성전자가 일단 양산에 성공했기 때문에 1차 관문은 통과했다고 볼 수 있다. 수율 확보를 위한 최첨단 장비의 신속한 도입이 2차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호암(이병철 삼성 창업주)이 가전을, 이 회장이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면서 압박이 상당했을 텐데 '목숨 걸고 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각오가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다"고 평했다.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