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수의 법경제학자의 눈] 자율규제를 위한 규제 인프라의 설계

규제 방향 틀리면 기술개발 저해
원칙과 규정 유연하게 적용하되
전문·독립성에 기반한 판단 필요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들어 자율규제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자율규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규제에 대한 시각으로 종종 보이는 것은 규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즉 규제를 얼마나 강하게 또는 약하게 할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 개별 기업이 자율적 역량을 발휘할 가능성이 좁혀질 것인지 또는 반대로 폭넓게 나타날 것인지 여부를 논의의 핵심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여러 당사자로 하여금 유불리에 기반한 힘겨루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그런데 인공지능이나 데이터같이 새로운 기술 개발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영역은 규제 논의 첫 단계부터 쉽지 않은 과제에 봉착한다. 미래의 기술 개발이 어떤 양상으로 이뤄질 것인지에 대한 예측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규제 방향을 잘못 잡으면 유용한 기술의 개발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기술 개발에 대한 배려가 오작동하면 사회적 부작용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규제의 대원칙(principle)을 정하는 것과 세밀한 규정(rule)을 정하는 것 사이에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비유를 들어 생각해 보자. 자동차 운전과 관련해 중요한 원칙 하나는 과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과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양한 요소에 따라 달리 정해질 수 있다. 도로 상황, 운전자의 운전 역량, 차량 상태를 비롯해 매우 다양한 변수에 따라 과속으로 판단되는 운전 속도가 달리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과속 기준을 설정해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에서는 주로 도로 상황을 위주로 예컨대 시속 50㎞를 과속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정하고 규율하게 된다.여기서 ‘과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칙에 해당하고, ‘시속 50㎞ 제한’은 규정에 해당한다. 신기술의 영역에서는 규정을 많이 만들면 경직적 결과가 나타나기 쉽다는 중대한 한계가 있다. 비유를 이어가자면, 자동차 관련 기술 개선으로 시속 60㎞로 규정을 바꿔도 대부분 경우에 안전운전이 가능해진 상황이라면 시속 50㎞ 규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지만 일단 정해진 규정을 유연하게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신기술과 관련해서는 상세한 규정을 정하기보다 원칙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조될 수 있다.

한편 원칙과 관련해서는 그 해석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과속 여부에 대해 여러 요소에 따라 구체적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기술과 관련된 여러 요소에 따라 원칙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개별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해석의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커질 수 있다.그 결과 상세한 규정 마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고, 이는 결국 경직성을 불러오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운전 속도에 관한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 개인과 상황에 따라 시속 40㎞ 제한이 있더라도 안전운전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 반대로 시속 60㎞ 이상에서도 안전운전에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일괄적으로 시속 50㎞로 정하게 되는 경직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기술 영역에서 이러한 경직성은 새로운 실험적 시도 자체를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악순환이 나타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원칙에 기초해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해석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하는 환경 조성이 전제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성과 독립성 그리고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이 존중되는 규제 인프라를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한 규제 인프라가 마련돼야 규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