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T 대표가 임원들에게 'NO 멀리건' 골프 주문한 까닭

"골프 기본은 엄격함과 공정함"
최고위 임원들에게 '골프 룰' 알려
미국 프로골프 수준으로 엄격

기업 문화의 '작은 변화' 시도
"스포츠의 기본은 공정한 경쟁
정직, 도전의 가치를 세울 것"
벙커샷을 하고 있는 PGA 골프 선수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실리콘밸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첫 라운딩을 나갔는데 볼을 봐주는 캐디(경기보조원)가 없었다. 그린에선 좀처럼 '오케이' 콜이 들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홀에서 '더블 파(double par)'를 넘겼는데도 동반자들은 "이제됐다"는 얘기를 안 했다. 경사면에 올라가도 "편한 곳에서 볼을 던져 놓고 치세요"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안 봐주는 건가'란 생각까지 들었다. 원래 골프를 잘 치지는 않았지만 그날 스코어는 140에 가까웠다.

라운딩 후 동반자들에게 한국의 골프룰에 대해 얘기했다. "그게 골프냐"는 반응이 나왔다. 한 동반자는 "많은 미국인들은 라운딩 때 PGA룰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골프를 시작한 지인은 "몇 년 전 한국 골프장에서 스코어가 10타 이상 적게 나왔지만 기분이 마냥 좋진 않았다"며 "경기의 규칙이 무너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명랑골프에 기울어진 한국..."골프 본연의 스포츠 정신 지켜야"

No 멀리건, No 일파만파.

(멀리건은 골퍼가 티샷을 잘못쳤을 때 벌타 없이 다시 한번 치게 해주는 것, 일파만파는 첫 홀에서 한 명이라도 파를 하면 보기나 더블보기 등을 기록한 동반자의 스코어도 파로 기록하는 것)

SK텔레콤의 한 부서가 최고위 'C레벨' 임원들에게 전한 'SKT 골프룰(rule)' 1번 조항이다. 이어지는 2~10번 조항들도 PGA(미국남자프로골프)룰 뺨치는 수준이다. '벙커에 들어간 공을 꺼내거나 옮겨 칠 수 없음', '모래에 클럽 닿기 금지', '도로 위 공은 옮길 수 있으며, 도로 중앙 기준으로 좌우측 방향을 지켜 한 클럽 이내 드롭' 등이 대표적이다. 골프룰 말미엔 'PGA룰과 거의 같으며 '오케이 인정' 등 일부 변형은 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될 것'이란 문구가 붙어있다. SKT 골프룰엔 유영상 SK텔레콤 대표(CEO)의 뜻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T룰 소개글은 "코스는 있는 그대로, 볼은 놓인 그대로 플레이해야한다"는 PGA 1번 규칙으로 시작한다. 이어 "골프는 스포츠고 스포츠 정신의 기본은 공정함과 엄격함"이라며 "우리나라에선 편의와 관행 하에 '대충, 좋은 게 좋은, 명랑' 라운드로 기울어졌다"고 지적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영상 SK텔레콤 대표(CEO). 한경DB

"골프룰 통해 '공정', '정직', '도전'의 가치 세울 것"

유 대표가 골프룰을 강조한 것은 공정하고 엄격한 룰 적용을 통해 회사 문화에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유 대표는 "한 타, 한 타 정성을 다하고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하기 위한 작은 변화를 만들어갈 것"이라며 "사내 임원 간의 라운드만이라도 '공정', '정직', '도전'의 가치를 세워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SKT룰을 적용하다보면) 임원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늘 것"이라고 덧붙였다.유 대표의 SKT룰이 알려지면서 일반인 골퍼들 사이에선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PGA의 고향 미국에서도 일반인들끼리의 라운딩 때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며 "즐기는 골프도 좋지만 한국에선 유독 골프 룰에 관대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에서 '오케이', '멀리건' 등이 당연시되면서 골프가 갖고 있는 본연의 스포츠 정신이 퇴색한 측면이 있다"며 "공정, 정직, 도전을 강조한 유 대표의 지론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참고로 유 대표는 종종 '싱글' 스코어를 기록하는 실력파 골퍼라고 한다. 골프를 즐기는 박정호 SK텔레콤 부회장 영향으로 SK텔레콤 임원들의 골프 수준은 다른 대기업 대비 '상당히 높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 대표는 지난해 11월 SK텔레콤 CEO에 올랐다. SK텔레콤은 유 대표 취임 이후 도심항공교통(UAM), 구독 서비스, 메타버스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내 유튜브 출연, 타운홀 직원 미팅 등을 통해 열린 기업 문화를 뿌리내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