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야성 잃어가는 한국 건설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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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층·최장 기록 '옛 영광'“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국내 건설사들이 지방 재건축사업장에서 치고받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건설사·정부 긴밀히 협력해야
김은정 건설부동산부 기자
중동 카타르에서 플랜트 건설 업무를 맡고 있는 A씨가 보내온 이메일에는 옛 영광에 대한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한국 건설산업의 해외 경쟁력을 진단한 본지의 ‘수출 효자 건설이 사라졌다’ 기획 기사에 대한 소감을 전해온 그는 “한때는 세계 최고층 건축물을 건설하는 등 해외 시장에서 국내 건설사들의 위상이 높았는데, 요즘은 얼굴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국내 건설사들은 한때 해외에서 신기록 제조기 역할을 도맡았다. DL이앤씨와 SK에코플랜트가 건설한 터키의 차나칼레대교는 세계 최장 현수교다. 삼성물산이 2010년 아랍에미리트에 지은 부르즈 칼리파 빌딩은 아직도 세계 최고층 건축물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이제 옛 영광으로 남겨졌다. 2010년 중반 해외 건설에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국내 건설사들은 철저하게 안방 주택사업에만 매달렸다. 때마침 주택시장도 호황기를 맞을 때였다. 열사의 땅 중동, 척박한 중남미를 가리지 않고 해외 수주 현장을 누비며 한국 건설의 존재감을 뽐내던 건설맨의 자존심에 금이 간 지는 오래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 인력을 양성한다고 수백 명씩 신입·경력 직원을 뽑고, 웃돈을 주면서까지 경쟁사에서 인재를 영입했는데 이젠 해외 사무소를 없애고 전문 인력들을 주택사업부로 돌리는 현실입니다.”건설종사자뿐 아니라 플랜트 부문 교수들의 걱정도 매한가지였다. ‘해외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건설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움츠러들었다. 원가 계산 실패로 조 단위 영업 손실을 경험한 건설사들은 준비·투자 기간이 길고 불확실성이 큰 해외 사업보다 당장 수익이 나는 국내 주택 사업을 더 선호했다. 대형 건설사 해외 사업 담당 임원은 “해외 건설사들이 너나없이 달려드는 대규모 공사인데도 국내사들은 입찰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자괴감마저 든다”고 털어놨다.
이복남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 산학협력중점교수는 “국내 건설 시장이 포화 상태에 달해 해외 시장 재진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정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 역량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각종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올 연말 코로나19 확산 시기 억눌렸던 해외 수주가 봇물 터지듯 연이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한국 건설은 내수에만 매달리는 ‘초식 산업’으로 전락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