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경력증명서에 넣을 수 없는 나의 경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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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6
문서에 담을 수 없는 삶의 이력들신문을 읽는 독자들과 ‘시적인 순간’을 나누기 위해 글을 쓴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시적인 순간을 고르는 건 언제나 고민이다. 너무 큰 말들을 생각하는 일에 지쳐 이슬처럼 작은 것을 원하게 된 순간에 대해서도 좋고, 점심시간이면 가는 길 건너 보리밥집 이야기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김밥 싸기·갯벌 체험·자전거 타기…
보기만 해도 좋은 새끼 오리들
작은 생명들이 전하는 위로까지
직책·역할로 한정되지 않고
위로·배려·사랑도 담을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경력증명서 아닐까
이소연 시인
이런저런 시적인 순간을 떠올리다가 들어간 인스타 라이브 방송에서는 얼마 전 신간을 낸 서효인 시인이 김복희 시인과 작은 북토크를 하고 있다. 그는 새벽 5시30분에 글을 쓴다고 한다. 그의 시적인 순간, 새벽 5시30분을 상상한다. 그가 수없이 썼다 지웠다 하는 문장들 사이에서 망설이며 태어난 시의 첫 얼굴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시적인 순간이지 나의 시적인 순간은 아니다.사실 요새 글을 쓸 만한 여유가 없다. 새롭게 일하게 될 곳에서 내게 경력증명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원하는 건 공식적이고 문서화돼 있으며 직인이 찍힌 경력증명서인데 내게 그런 서류를 흔쾌히 떼어 줄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멋쩍고 구차한 마음에 나의 경력은 선별되고 축소되고 지워졌다. 경력 증명서를 떼는 것이 이렇게나 마음을 힘들고 수고롭게 한다. 그런데 김은지 시인이 경력증명서를 떼는 내가 정말 시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경력증명서에도 시적인 순간이 숨어 있을 것 같다.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온 나의 경력들이 지워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여기 열거해본다. 팟캐스트 ‘도심시’의 진행자가 됐는데, 팟캐스트 방송 링크를 경력증명서로 제출하고 싶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의 소풍 김밥을 싼 경력,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과 찾은 강화도 갯벌에서 바닷물이 차오르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마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 골목길도 제출하고 싶다. 그리고 오리를 걱정하느라 경력증명서를 떼지 못한 경력까지도….
오월의 어느 저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방학천을 걷다가 멈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수풀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오종종하게 거니는 오리 가족 때문이었다. 작은 조약돌 같은 새끼 오리들이 어미를 쫓아 물결무늬를 젓는 모습을 가만가만 마음에 담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저 작은 생명 앞에서 바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새끼 오리들이 내는 맑은 울음소리가 생활에 젖은 마음 한구석을 위로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를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다가도 아이 어릴 적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오리는 온종일 물속을 쑤시고 다니는 게 일이다. 저렇게 다니니까 수면 밖의 공기가 물속을 드나들 수 있고 물고기들이 아가미를 잘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사물 이름, 식물 이름, 공룡 이름, 자동차 이름을 알려 주던 시절이 있었다. 저 오리도 세상에 나와 물이 무엇인지, 물갈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런 것들을 배우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오리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방학천 다리 밑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봤다. 오리 가족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모습이 찍힌 CCTV 영상과 함께 자수를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중앙일간지에도 보도된 사건인데, 검거된 10대 형제가 오리 가족을 죽인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호기심의 결과가 참혹하다. 그날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였다.
여기서 나는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저 아이들이 오리가 됐으면 좋겠다. 직접 오리가 돼 방학천을 누볐으면 좋겠다.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물줄기의 더러움과 맑음 사이에서 삶을 살아가는 긍휼한 태도를 배웠으면 좋겠다.영화 ‘브라더 베어’에서도 곰을 죽인 사람이 곰이 된다. 자신이 혐오하던 존재가 돼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통하며 화목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 동물을 이해하는 일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순간에도 살아 있는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리 가족의 부재에 대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감정이 슬픔이듯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이미 뼈아프게 동물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경력증명이란 게 어떤 직책, 역할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누군가를 위로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담아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