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ESG는 '절대善' 아니다

김현석 뉴욕 특파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지난 3월 월가에 ‘찌라시’ 하나가 돌았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지표로 널리 쓰이는 S&P의 ESG 등급에서 러시아의 에너지 회사 가스프롬, 로즈네프트 등이 미국 엑슨모빌, 셰브런 등보다 더 높은 등급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 국책 은행인 스베르방크도 미국 JP모간보다 점수가 높았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스베르방크가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를 받았음에도 말이다. S&P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이를 보도한 뒤 웹사이트에서 러시아 기업에 대한 등급을 모두 삭제했다.

지난 10여 년간 월가를 지배해온 ESG가 변화의 갈림길에 섰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그동안 가려져 있던 어두운 민낯이 드러난 탓이다.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자 ‘탄소 중립’을 지향해온 서방은 ‘기후 현실주의’로 급히 방향을 바꿨다. 미국은 석유·가스 채굴을 위한 국유지 입찰을 재개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은 석탄 화력발전 가동을 확대했다.

ESG 성역이 깨진다

JP모간에 따르면 일부 투자자는 그동안의 ESG 투자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는지 의구심을 나타냈다. 사회적 측면에서 화석연료에 대해서도 일정한 수준의 투자는 지속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0년 연례 서한에서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 철회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이 회사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월 “높은 에너지 가격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부담을 안겨주고 있고, 이 수준이 지속된다면 정당하고 올바른 에너지 전환을 하지 못할 것”이라며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웨덴의 최대 금융회사인 SEB그룹은 군수산업 투자를 금지해왔지만 4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수호하는 데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며 방침을 바꿨다.

‘그린 워싱(Green Washing)’ 문제도 커지고 있다. 그린 워싱은 기업이 ESG 지표를 과장해 이익을 보는 행위를 뜻한다. WSJ는 지난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골드만삭스의 ESG 펀드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SG 펀드’라고 광고한 뒤 ESG와 관계없는 기업에 투자하는 등 소비자를 기만한 사실이 없는지 본다는 것이다. 지난달엔 BNY멜론의 투자자문사가 투자자를 오도했다는 이유로 SEC로부터 15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또 다른 규제여선 안 돼

SEC가 추진해온 ESG 관련 공시 의무화도 역풍을 맞고 있다. 4월 대부분 상장 기업에 대해 기후변화 위험을 공시하도록 하는 초안을 공개하자 공화당은 기업의 컴플라이언스(법령 준수) 비용이 커진다며 반대하고 있다. 조 맨친 상원의원 등 민주당의 온건파 의원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차지하면 시행이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착한 투자’를 하겠다던 ESG는 그동안 비판받지 않는 ‘성역’이었다. “선(善)에 대한 기준은 모두 다르다”며 ESG를 비판해온 애시워스 다모다란 뉴욕대 교수 등은 오히려 비난받았다. 그는 작년 10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ESG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죄인이고 나쁜 사람이 돼버린다”며 “이는 ESG에 대한 토론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무조건적 ‘선’이란 시각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바뀌고 있다. 건전한 토론을 통해 ESG가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한 화두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