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석탄 선언한 국민연금, 한전 투자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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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탈석탄 금융을 선언한 국민연금은 후속 작업으로 네거티브 스크리닝 기준을 마련 중이다. 한전과 5개 발전 자회사들이 투자 배제 대상에 포함될 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단순한 투자 배제보다는 이들의 에너지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한경ESG] 이슈 브리핑국민연금이 지난해 탈석탄 선언을 한 후 1년여가 지났다. 지난해 5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국민연금기금 투자 제한 전략 도입 방안’을 심의·의결하면서 국민연금이 탈석탄을 본격 선언했다. 탈석탄 선언에서 국민연금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책임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올 하반기 구체적 투자 배제 전략(네거티브 스크리닝)을 담은 탈석탄 로드맵을 내놓을 예정이라 주목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9월 말 기준 918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세계 3위 규모 연기금이다. 국민연금은 책임투자 차원에서 재무적 요인과 함께 비재무적 요인을 투자 결정에 반영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통합 전략을 도입한 데 이어 지난해 5월 국민연금기금 운용지침(투자정책서)에 네거티브 스크리닝 조항을 신설하고 석탄채굴·석탄발전 산업을 포함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은 딜로이트안진에 연구 용역을 발주, 지난 4월 결과를 보고받고 세부 사항을 조율 중이다. 석탄 투자 좌초 자산되면 수익률 악영향
다만 국민연금이 네거티브 스크리닝을 도입할 경우 해당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한국전력과 석탄을 사용하는 한전의 5개 발전 자회사들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할지 여부가 초점이다. 세계 금융시장의 경색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네거티브 스크리닝이 시행될 경우 석탄발전사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탈석탄의 적절한 시기를 놓쳐 석탄산업이 좌초 자산이 될 경우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지난 6월 발표한 지난해 국민연금 기금운용 성과 평가 결과 기금운용 수익률은 10.86%로 전년(9.58%)보다 높았다.
국민연금의 연구용역을 맡은 딜로이트안진은 구체적 투자 제한 전략으로 정량 목표는 석탄산업의 매출 비중을, 정성 기준은 에너지전환 노력 등을 제시했다. 1안은 매출 비중 30% 이상과 정성 기준 미적용, 2안은 매출 비중 30% 이상과 정성 기준 모두 적용, 3안은 매출 비중 50% 이상과 정성 기준 모두 적용 등이다. ‘매출 30% 이상’은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이나 알리안츠, 네덜란드 공적연금(ABP) 등이 사용하는 기준이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 등은 ‘매출 50% 이상’ 을 기준으로 적용한다. 딜로이트안진은 매출 비중을 발전용 석탄 채굴에 한정할지, 아니면 발전사업도 포함할지, 또 지배력을 보유한 기업이 있을 경우 이를 매출 비중 산정에 포함할지 여부 등을 추가 논의 사항으로 꼽았다. 정성 기준으로는 석탄기업이 발행한 녹색채권에 대한 투자와 해당 기업의 에너지 전환 계획이 있는 경우 투자를 허용할 것으로 제안했다. 에너지전환 계획의 경우 장기적으로 석탄발전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계획을 내놓고 실행하면 조건부로 투자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올해 중으로 국민연금의 투자 제한 기준이 확정되면 실제 투자 철회는 오는 2024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정부의 제4차 에너지 기본계획과 에너지정책 방향도 최종안에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발표한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은 2030년까지 원전발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하고, 안정적 전력 수급과 전력 시장 상황 등을 고려해 석탄발전을 탄력적으로 운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너지원별 발전 비중은 연말에 나오는 제10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서 밝힐 예정이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네거티브 스크리닝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며 “배제 대상 석탄산업을 어디까지로 정할지는 매우 민감한 부문이며, 특히 한전 발전 자회사의 석탄발전에 대한 투자를 어떻게 할지 고심 중일 것“이라고 말했다.탈석탄 금융 선언에도 늘어난 석탄금융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그린피스와 공동 발간한 <2021 한국 석탄금융 백서>에 따르면 석탄발전 신규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나 채권투자 중단을 선언한 금융기관은 2020년 18개에서 2021년 100개로 크게 늘어났다. 국민연금은 물론 KB·하나·우리·농협·신한 금융그룹이 탈석탄을 선언했다. ‘탈석탄’이 ESG 금융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그러나 석탄금융의 규모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2021 한국 석탄금융 백서>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1년 6월까지 이루어진 석탄금융 누적 지원 규모는 74조9000억원에 달한다. 2020년 6월 기준 59조5000억원에서 크게 늘어난 액수다. 공적 금융기관 중 석탄금융 1위는 국민연금(9조8499억원)이다. PF가 1716억원, 회사채가 9조6783억원을 차지한다.
국민연금은 지난 6월 초 국내 우량 기업 지분 확대를 이유로 금융위원회에 한전의 대량주식취득 승인 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 향후 3년간 한전 주식을 추가로 사들여 현재 6.56%인 지분율을 1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기후솔루션은 입장문을 내고 “막대한 적자가 누적된 한전 주식을 추가로 사들이려는 것은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에 큰 리스크가 될 것”이라며 “한전 같은 화석연료 자산 비중이 높은 기업에 투자하는 등 탈석탄 선언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미국 CalPERS와 싱가포르 중앙연금기금(CPF)은 투자 제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CalPERS는 투자 제한 석탄 비중을 매출의 50% 이상으로 높게 잡는다. 일본 공적연금은 아예 네거티브 스크리닝 정책을 펴지 않는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이 낮아 국내처럼 석탄산업 의존도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27%이며, 일본은 20.5%다. 반면 탈석탄 금융 정책을 강도 높게 시행하는 노르웨이의 제조업 비중은 6.7%에 불과하다.정연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팀장은 “노르웨이 같은 유럽 국가들은 석탄발전 비중이 매우 낮고, 우리나라처럼 석탄발전 비중이 높은 일본·미국은 석탄발전에 대해 투자 제한 전략을 채택하지 않거나 느슨하게 운영한다“며 “한전 자회사들이 수소 암모니아 발전 등으로 에너지전환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탈석탄 추진과 석탄발전 기업의 에너지전환 지원은 상충되는 목표가 아니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