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만에 다시 읽는 '에세이 원조'

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
미셸 드 몽테뉴

번역·검수에만 15년 걸려 완역 발간
1988쪽 대작, 일주일 만에 초판 완판
38세 법관 물러난후 107편 짧은글 써
몽테뉴 "이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책"
영화 '몽테뉴와 함께 춤을' 스틸컷. 이은지 감독 제공
에세이의 시대다. 서점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전직 장관, 과학자, 축구 선수의 아버지, 유튜버 등이 쓴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상에서 느낀 바를 솔직하게 담아내는 에세이란 장르는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에세이를 읽다 보면 슬그머니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내가 쓴 나의 이야기가 일기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을 줄 만한 사람이 있다. 에세이를 처음 쓴, 에세이란 장르를 처음 연 미셸 드 몽테뉴다.민음사는 최근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쓴 <에세>를 발간했다. 1965년 고(故) 손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서를 내놓은 지 57년 만에 심민화 덕성여대 명예교수와 최권행 서울대 명예교수가 새로 한국어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번역에 10년, 검수에 5년이 걸린 대작이다. 세 권짜리 <에세>의 총 분량은 1988쪽에 달한다. ‘대체 누가 살까’ 싶지만 출간 1주일 만에 초판이 다 팔려 중쇄를 찍었다. 출판사는 3쇄 준비에 들어갔다. 벌써 2000질가량 팔렸다는 뜻이다.

<에세>는 ‘에세이’라는 글쓰기 형식을 탄생시킨 책이다. 몽테뉴는 친구, 아버지,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을 겪고 38세에 법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107편의 짧고 긴 글을 썼다. 이런 글에 ‘에세(essai)’란 이름을 붙였다. ‘시험하다’ ‘처음 해보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동사 ‘에세이예(essayer)’에서 착안해 그가 창조해낸 단어다. “이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종류의 책”이라고 몽테뉴는 선언하듯 썼다.
이 책이 후대에도 널리 읽히는 ‘고전’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를 인식하는 몽테뉴의 태도가 있다. 몽테뉴는 자신을 절대 진리를 깨우친 철학자나 신 앞에 복종하는 어린 양으로 그리지 않는다. 종교나 가문으로 자신을 정의하던 중세적 자기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그 순간의 사유’를 통해 설명한다. 몽테뉴는 이렇게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심 명예교수는 “몽테뉴는 영구불변의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로 인식했다”며 “그렇기에 언제나 타인에게 ‘너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이런 관념들이 발전해 오늘날 ‘자유’와 ‘개인’ 개념으로 정립됐다”고 설명했다.

몽테뉴에게 나와 너의 다름은 대화의 이유다. “우리 정신의 가장 비옥하고 자연스러운 훈련은 대화다. 나는 그것이 우리 삶의 다른 어떤 행위보다 더 달콤한 경험이라고 여긴다.” 자기 성찰을 통해 세상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는, 글쓰기의 정수다. 허무주의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니체조차 “몽테뉴가 글을 쓴 덕분에 이 세상에서 사는 기쁨이 늘어났다”고 했을 정도다.워낙 방대하고 명문장이 많다 보니 그간 나온 책들은 일부 내용을 발췌하는 정도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몽테뉴와 함께 하는 여름><인생의 맛> 등이 그런 책이다. 몽테뉴가 20여 년 동안 쓴 글을 통째로 읽는 것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심 명예교수는 <에세> 번역을 위해 프랑스 보르도로 떠날 때 동반자로 딸 이은지 영화감독을 택했다. 이 감독은 그 여정을 다큐멘터리 영화 ‘몽테뉴와 함께 춤을’에 담았고, 지난 14일 서울 신사동 이봄시어터에서 특별상영회를 열었다. 제목은 ‘오늘을 살라’는 의미를 담은 <에세> 속 구절에서 따왔다.

몽테뉴는 말했다. “나는 춤 출 때는 춤을 추고, 잠잘 때는 잠을 잔다. 그리고 아름다운 과수원 사이에서 홀로 산보를 하면 잠시 이 순간과 무관한 일을 떠올리지만 대부분은 산보로, 과수원으로, 홀로 있음의 아늑함으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내 생각들을 데려온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