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계를 뒤흔든 '봄의 제전'과 두 거장의 사랑[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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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 멋진 턱시도를 하거나 예쁜 드레스를 입고, 클래식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온통 난장판이 됩니다. 객석에서 갑자기 야유가 쏟아지고 고성이 오갑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나눠져 갑론을박이 펼쳐지죠. 그러다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합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얀 쿠넹 감독의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엔 20세기 음악계 최고의 스캔들로 꼽히는 순간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가 만든 '봄의 제전'이란 곡의 초연이 있었던 1913년 5월 29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영화는 초반 상당 부분을 이 순간을 상세히 묘사하는 데 할애합니다.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아내는 쏟아지는 야유에 표정이 점점 굳어집니다. 하지만 객석에선 공연을 흥미롭게 감상하고, 스트라빈스키를 유심히 지켜보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디자이너이자 패션의 아이콘인 코코 샤넬(1883~1971)입니다. 분야가 달라도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일까요. 이 공연으로 음악의 새 시대를 연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패션계의 한 획을 그은 샤넬은 이후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영화에선 스트라빈스키가 중년의 남성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가 '봄의 제전'을 초연했을 당시 나이는 31살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음악계를 떠들썩하게 할 문제적 대작을 내놓았단 사실이 놀랍죠.
이 곡은 고대 러시아의 봄맞이 의식을 담은 작품입니다. 풍년을 기원하는 이교도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1부는 '대지에 경배', 2부는 '희생제'로 나눠지죠. 스트라빈스키가 일종의 샤머니즘에 해당하는 의식을 음악에 담은 것은 날 것 그대로의 원시성과 폭발적인 생명력을 선율로 표현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듣기에 편안한 곡이 결코 아닙니다. 날카로운 불협화음, 변칙적인 박자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영화에서 '봄의 제전'은 발레 공연과 함께 연주되는데요. 이 곡은 원래 발레 음악으로 작곡됐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무용 전문가들이 함께 초연에 참여했죠. 러시아 유명 발레단인 '발레 뤼스'의 단장이자 뛰어난 공연 기획자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전설적인 발레리노이자 안무가였던 바슬라프 니진스키입니다.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뛰어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인물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등 대표작을 함께 올렸습니다.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의 동성 연인이자 그의 발레 계승자였으며, 실제 '봄의 제전' 안무를 맡았습니다. 영화에도 두 사람이 함께 '봄의 제전' 공연을 올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이들이 선보인 안무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기존 발레와는 전혀 다른 전위적인 동작들로 가득했죠. 다소 기괴한 안무로 인해 '봄의 제전'에 대한 논란은 더욱 확산됐습니다. 이를 본 프랑스 시인 장 콕토는 "숲 자체가 미쳐버린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의 실제 관계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는데요. 과연 모두 실화일까요. 영화는 영국 작가 크리스 그린홀즈가 샤넬이 노후에 회고한 이야기를 듣고 쓴 것으로 알려진 소설 <코코와 이고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는 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건 영화처럼 1913년 '봄의 제전' 초연 당시가 아니라 1920년인데요. 이땐 스트라빈스키가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할 때였다고 합니다. 샤넬이 스트라빈스키를 잠깐 후원했던 정도라는 얘기가 많죠. 정확한 진실이야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영화는 충분히 매혹적으로 다가옵니다. 음악과 패션의 역사를 바꾼 두 거장의 만남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은데요. 두 인물의 공통 분모도 눈에 띕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전통적인 관습과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습니다. 이를 통해 큰 성공도 이뤘죠. '봄의 제전'의 초연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 역시 "작곡가로서 보기 드문 성공을 이룬 작품"이라고 얘기했을 정도입니다.
샤넬은 편안하고 실용적인 소재들로 옷을 만들어, 코르셋에 속박돼 있던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인물로 유명합니다. 오랜 시간 사랑받는 향수 '샤넬 넘버 5'도 탄생시켰죠. 샤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늘 남달라야 한다." 그 '남다름'이라는 것이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먼 얘기로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꼭 그렇진 않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스트라빈스키가 늘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 샤넬이 사람들을 사로잡을 향수를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향을 찾고 고민하는 모습을 부각합니다. 샤넬이 말한 남다름은 이처럼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