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춤추는 것 같다면 소설은 마라톤 뛰는 일"

박연준 시인, 등단 20년 만에
첫 소설 《여름과 루비》 출간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독자가 ‘이건 꼭 나도 모르던 내 마음 같다’고 느끼게 하는 글이에요. 시든 소설이든 마찬가지죠.”

작가 박연준(사진)이 시인으로 등단한 지 20년 만에 첫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은행나무)를 냈다. 지난 15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출판사 은행나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시를 쓸 때 그랬듯 독자들이 ‘이건 내 이야기다’ 하면서 읽기를 바라며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맡은 업무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은 ‘여름’이라는 이름의 소녀로, 일곱 살에 이미 삶의 피로감을 알아버렸다. 소설은 여름의 가족사, 단짝 루비와의 우정을 통해 사랑과 성장에 대해 말한다. 작가 특유의 정밀한 문장과 리듬감 덕분에 소설의 한 장이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박 작가는 “회사원인 적 없는 어른,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어른은 있어도 유년시절을 안 겪어본 어른은 없다”며 “지난한 유년을 통해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 20년차인 그가 장편소설에 도전한 건 새삼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대학 시절에는 시와 함께 소설도 여러 편 썼다. 등단 이후 에세이집 《소란》 《모월모일》 등을 내면서 ‘산문 잘 쓰는 시인’이라는 소문도 났다. 여러 출판사에서 ‘소설을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던 중 은행나무가 격월로 발간되는 문예지 ‘AXT’에 2020년 여름부터 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1년간 연재한 내용을 묶고 보완해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박 작가는 “시가 춤추는 것 같다면 소설은 마라톤을 뛰는 일 같았다”며 “첫 장편을 쓰면서 동료 소설가들을 더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 “써놓은 원고도 없이 무턱대고 연재를 수락하는 모험을 한 덕분에 생전 나지 않던 흰 머리카락이 세 가닥 생겼다”며 웃었다. 그는 왜 첫 소설의 소재로 유년 시절을 다뤘을까. 박 작가는 “미성숙한 존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특별한 데가 있다”며 “세상에 적응하기 전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박연준은 조용히 많이 읽히는 작가다. 에세이집 《소란》만 해도 그렇다. 2014년 출간 초반에는 큰 반응이 없었는데 서서히 입소문을 타더니, 지금까지 3만 부 넘게 팔렸고 최근 10쇄를 찍었다. “저는 모든 책이 그래요. 나오자마자 ‘빵’ 터지는 책은 없어요. 독자들이 ‘다단계’처럼 서로 추천해서 천천히 독자가 늘었죠. 이번 소설도 그렇게 꾸준히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