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경기 침체)의 공포’ 속에 어렵지 않은 업종이 없지만 ‘금융의 미래’로 촉망받던 핀테크 업계가 빠진 수렁은 더 깊어 보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증시에 상장한 핀테크 기업 30여 곳의 주가는 올 들어 평균 50% 급락했다. 같은 기간 나스닥지수는 30% 빠졌으니 충격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핀테크는 ‘집콕 수혜주’의 하나로 급성장했지만 그에 걸맞은 실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분간 저축이 줄고 연체율은 높아질 가능성이 큰 데다, 금융감독 당국이 핀테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는 점도 악재다.
비상장 핀테크 벤처의 몸값 역시 뚝뚝 떨어지고 있다. BNPL(선구매 후결제) 시장 최강자인 스웨덴 클라르나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460억달러(약 60조6000억원)로 인정받은 기업가치가 얼마 전 투자 유치 때는 67억달러(약 8조8200억원)로 깎였다. 1년 새 85% 쪼그라든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스타트업으로 꼽혔던 결제업체 스트라이프의 평가 가치도 28% 줄었다. 외신들은 투자를 따내기 위해 몸값을 자진 삭감하는 곳이 줄을 이을 것으로 내다봤다.“지난해 핀테크 업계가 유치한 자금은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준이었다. 이젠 벨트를 꽉 매야 할 것이다.”(비즈니스인사이더) “벨트가 조여지고 나면 핀테크 기업의 생존 가능성은 대차대조표상 현금으로 평가받을 것이다.”(파이낸셜타임스)
'60兆 데카콘' 몸값조차 85% 빠져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카카오뱅크 주가는 고점 대비 3분의 1, 카카오페이 주가는 반의반 토막이 됐다. 카뱅을 따라 올해 화려하게 상장하려던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는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토스 창업자 이승건 대표는 임직원 간담회에서 “2~3년은 시장이 좋지 않을 것이고 상장도 그만큼 미뤄야 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고 한다. 케이뱅크나 토스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입지가 모호한 중소 핀테크 기업들은 벤처캐피털의 투자 검토 대상에서 지워지고 있다. 몇 년 동안 “투자 못 받으면 바보” 소리가 나올 정도로 ‘쉬운 돈’이 넘쳐났던 스타트업 시장이다. 화려한 복리후생과 파격적 연봉, 나날이 치솟는 기업가치를 마음껏 즐긴 핀테크인들은 혹한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물론 이런 어려움은 핀테크 기업만의 일도 아닐뿐더러 부풀 대로 부푼 거품을 걷어내는 긍정적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시장 원리대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안타까움이 남는 점은 ‘비정상적’으로 투자금이 넘쳐났다던 그 시기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음껏 사세를 키우지 못한 스타트업도 꽤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2020년 전자금융법 전면 개정을 선언했다. 핀테크 사업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결제 송금 등 허용 업무를 대폭 넓혀주겠다고 했다. 당시 여당과 조율해 만든 이 법안은 2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적은 자본금으로 마이페이먼트(MyPayment) 등의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회사들만 골탕을 먹고 있다. 지난해에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이유로 금지한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를 중소 스타트업에 허용하기로 했지만, 이 규제 특례 역시 감감무소식이다. 인슈어테크(보험+기술) 스타트업 중엔 해외로 무대를 옮기는 곳도 있고 폐업을 고민하는 곳도 있다.
적자생존 시기 맞은 금융 벤처들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테크크런치는 “핀테크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 유니콘 기업 탄생, 인수합병(M&A), 기업공개(IPO) 등 모든 것이 위축되고 있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다”고 했다. 절대적 규모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벤처 투자금의 20% 안팎을 핀테크가 차지하고 있다. 자기들은 좋다고 하는데 대중은 아직 아리송해하는 블록체인과 달리 핀테크는 실체가 있고 효용을 준다. 김주현 신임 금융위원장은 “금융에서도 방탄소년단(BTS)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당국이 약속한 정책을 그대로 지키기만 해도 핀테크 기업들이 한결 수월하게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