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 인상주의 전파한 '빛의 화가' 북해의 비경을 화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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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명작 유레카“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중략)” 백석의 시 ‘바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
덴마크 최북단 어촌 '스카겐'
크뢰위에르, 1891년 정착
아름다운 풍경 창작혼 자극
저녁 푸른빛 감도는 시간대
야외서 직접 관찰하며 그려
대표작 '스카겐의 여름저녁'
노르웨이 출신의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1851~1909)도 백석만큼이나 바다를 사랑했다. 특히 ‘세상의 끝’으로 불리는 덴마크 최북단에 있는 스카겐 그레넨 지역 연안 바다는 그를 매혹하는 대상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북해와 발트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스카겐의 바다에서는 서로 다른 색을 가진 두 바다가 부딪히며 선명한 경계선을 만들어낸다. 염도가 높은 서쪽 해류(북해)와 염도가 낮은 동쪽 해류(발트해)의 농도 차이가 두 바다가 섞이지 않는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이 빚어낸 비경(境)은 북유럽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세기 말 스카겐은 주민이 약 2000명에 불과한 작은 어촌인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하지만 화가들은 스카겐의 기후와 토양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에 이끌려 이곳에 모여들었다. 스카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 그룹도 생겨났는데 바로 ‘빛의 화가들’로 불린 ‘스카겐 화파’였다. 크뢰위에르는 인상주의를 신봉한 스카겐 화파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1882년 스카겐을 처음으로 여행한 이후 매년 이곳을 찾았고 덴마크 화가 마리 크뢰위에르와 결혼한 이후 1891년 아내와 함께 스카겐에 정착했다. 스카겐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크뢰위에르의 창작혼을 자극했다. 그는 야외에서 어촌마을 풍경과 주민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기와 빛에 의해 달라지는 색의 변화를 추적했다.다음 두 점의 그림을 감상하면 크뢰위에르가 왜 스카겐에 정착했는지, 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다를 그렸는지 이해하게 된다. 먼저 ‘스카겐 해변의 화가와 그의 아내’(1899)다. 어느 여름날 저녁, 크뢰위에르와 부인 마리가 반려견과 함께 해변으로 산책을 나섰다가 밤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돛단배들이 오가고 푸른 하늘에는 반달이 떴다. 투명한 달빛이 잔물결에 비쳐 반짝인다.
크뢰위에르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반려견, 스카겐의 바다를 이 그림에 표현했다. 1888년 38세인 크뢰위에르는 파리에서 22세인 마리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1889년 7월 23일 결혼했다. 덴마크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마리는 숙명의 연인이자 헌신적인 아내,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그는 아름다운 마리가 스카겐 바다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내와 팔짱을 낀 채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연출해 진한 부부애를 과시했다. 이 그림은 빛이 사물의 형태와 색채를 결정한다는 인상주의 핵심 개념이 담겨 있다. 화면에는 해가 진 뒤에도 빛이 남아 있는 북유럽 특유의 백야 현상이 생생하게 표현됐다. 하늘과 바다, 모래, 인물, 개, 심지어 그림자도 푸른 색조로 물들었다.크뢰위에르는 여름날 저녁 대기에 푸른 빛이 감도는 시간대에 매혹됐고 이를 ‘blue hour(푸른 시간)’라고 불렀다. 이는 ‘해가 지고 달이 바다에서 떠오를 때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는 화가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크뢰위에르가 인상주의 작업 방식을 본받아 야외 현장에서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정보도 알려준다. 해안선을 따라 물결 모양을 이루며 뾰족한 형태로 형성된 특이한 지형을 통해서다. 수억 년의 세월이 만든 독특한 모래 사구는 스카겐에서만 볼 수 있는 극적인 풍경 중 하나다.
여름 저녁에 두 여인이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거닐며 다정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한 ‘스카겐의 여름 저녁’은 ‘푸른 시간’을 대표하는 작품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많다. 흰 드레스를 입은 뒷모습의 두 여인은 마리와 덴마크 화가인 안나 앙케르다. 파도의 잔물결이 부드럽게 다가와 해변의 모래를 적시고 하얀 모래사장에는 여인의 긴 드레스 자락이 쓸고 간 흔적과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화가는 왜 두 여인의 뒷모습을 포착했을까? 자신이 여인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감상자도 대상을 응시하기를 바랐다. 대각선 구도를 선택한 것도 두 여인과 함께 긴 해변을 따라 걷는 듯한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두 점의 매혹적인 바다 그림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동한 인상주의가 북유럽에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