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좋은 창업은 불황에서 더 빛난다

서기열 실리콘밸리 특파원
“불황이 언제 어떤 강도로 올지 예측할 수는 없어요. 제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통할 수 있을 때 창업해야죠. 살아남으면 회사는 더 단단하게 성장해 있을 겁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행사장에 만난 한 엔지니어는 경기침체 우려에도 창업에 나서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빅테크 기업에서 인정받는 엔지니어라는 안정된 일자리를 버리고 그는 다음달 블록체인과 관련된 스타트업을 만들 예정이다.40여 년 만의 인플레이션이 미국 경제를 짓누르고 있지만 실리콘밸리의 창업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미래에 현실로 그려내겠다는 도전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디어와 타이밍이 중요

경기 흐름도 성공의 변수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통할 아이디어라고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은 말한다. 웹3.0 분야 스타트업을 선보일 계획이라는 한 창업가는 “스타트업은 10년은 봐야 하고 아이디어가 시장에 먹힐 것이란 확신이 중요하다”며 “불황에도 창업할 사람들은 한다”고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는 경기를 타지 않는다는 얘기다.

경기보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시기)’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두 번째 창업에 도전한다는 한 창업가는 “준비하고 있는 창업의 핵심 기술이 지금 트렌드에서 필요하다면 시장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며 “불황이라고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그 아이디어는 생명력을 잃는다”고 했다. 인공지능(AI) 관련 사업을 미뤘다가는 경쟁자가 너무 많아져 결국 창업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물론 불황이 닥치면 창업자들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 테크산업 분석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전 세계 스타트업이 유치한 자금은 1085억달러(약 142조원)로 전 분기 대비 23% 줄었다. 분기 기준으로 거의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경기침체에 대한 경고등이 커지면서 스타트업 투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경기침체는 또 다른 기회

창업 초기 자금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는 의견도 많다. 한 창업가는 “창업 초기 기업가치는 기대보다 낮은 수준으로 인정받겠지만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경기가 회복되면 얼마든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창업가는 “오히려 불황에 더 엄격하게 평가받아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경쟁력이 더 뛰어날 수 있다”며 “지금처럼 힘들 때 잘 준비한 스타트업은 경기가 좋아지면 더 치고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로서도 위기는 좋은 기회다. 거품을 걷어낸 밸류에이션으로 좋은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어서다. 실리콘밸리에서 17년 동안 VC 투자를 해온 이호찬 ACVC파트너스 대표는 “위기는 오히려 좋은 회사가 나오는 데 좋은 시기일 수 있다”며 “빅테크 기업의 해고가 늘어나면 스타트업의 핵심인 좋은 인력을 구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타트업도 자금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본업에 더욱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활황기에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아 투자금을 많이 받으면 방만하게 경영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황에는 그럴 위험이 낮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글로벌 공유경제를 이끄는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에어비앤비와 우버가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던 2008년, 2009년에 각각 창업했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만하다. 불황에도 기회는 있고 위기 속에서 기업가정신은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