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90주년 전시회 '특명'…브라운관TV 구하기 대작전

백남준아트센터 '바로크 백남준' 전시회
바로크 레이저에 대한 경의.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바로크 건축의 거장' 요한 슐라운의 탄생 300주년 기념작을 만들어달라."

1994년 백남준은 독일 베스트팔렌미술관으로부터 이같은 부탁을 받았다. 당시 이 미술관은 슐라운을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직전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가 마침 독일 뮌스터를 방문하자 작품을 의뢰한 것이다. 백남준은 작품을 설치할 장소로 독일의 한적한 시골의 로레토 교회를 택했다. 슐라운이 직접 건축한 바로크풍 건축물이다. 백남준은 교회의 창문을 모두 닫아 실내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레이저의 불빛이 바로크식 중앙 돔을 가로지르도록 했다.

그곳에서 백남준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 손가락을 레이저와 맞대거나, 레이저로 담뱃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만드는 등 10분간 퍼포먼스를 펼쳤다. 400년 전의 바로크 건축과 신기술인 레이저가 만난 순간이었다. 백남준의 후기 작품세계의 시작을 알린 '바로크 레이저(1995년)'다.

28년 만에 되살아난 '바로크 레이저'

프로젝트가 끝난 후 교회에서 철거된 이 작품은 지난 28년간 볼 수 없었다. '야곱의 사다리(2000년)' 등 해외에서 극찬을 받았던 백남준의 레이저 작품들의 '시초' 격이지만, 사료와 장비를 구하기 쉽지 않아 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랬던 바로크 레이저가 다시 관람객 앞에 등장한다. 백남준의 90번째 생일을 맞아 지난 19일부터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바로크 백남준' 전시회에서다. 당시 작품에 직접 참여했던 엔지니어와 후배 예술가들의 오마주 작품 '바로크 레이저에 대한 경의'를 통해 재탄생했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테크니션으로 일했던 이정성 엔지니어와 미디어·레이저 아티스트, 건축가 등 4명이 협업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이 엔지니어가 1995년 바로크 레이저를 찍은 영상을 보며 마치 고고학자처럼 작품을 구현했다.

전시장 안에 작은 교회 모양의 구조물을 지나면 천장에서 쏜 레이저가 방 끝에 있는 촛불까지 3차원으로 가로지른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빛이 서로 겹쳐지고, 그 뒤에는 CRT 프로젝터를 통해 안무가 머스 커닝햄의 춤추는 영상이 홀로그램처럼 비춰진다.

백남준 아트로 '귀한 몸' 된 CRT

백남준아트센터는 28년 전 작품을 되살리기 위해 CRT 프로젝터를 직접 구하러 다녔다. CRT는 빛의 삼원색인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이뤄진 3개의 브라운관이다. 브라운관 안에서 세 가지 색이 합쳐지면서 화면을 만든다. 1990년대까지 사용했던 뒷부분이 뚱뚱한 텔레비전이 바로 이 원리다. 백남준은 이 CRT 프로젝터를 조작해 이미지가 서로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촛불 하나.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하지만 이미 오래 전 단종된 CRT 프로젝터를 찾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프로젝터 시장이 발전하면서 중고시장에서조차 CRT가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는 "아트센터 소속 연구사들이 가전 도매상과 옛 기술자들을 알음알음 수소문하며 겨우 CRT를 구했다"며 "이미 고장난 CRT도 옛 장인들의 손을 빌려 다시 고쳐서 썼다"고 말했다. 이 엔지니어도 전시를 위해 수십여년 간 갖고 있던 CRT 프로젝터를 아트센터에 기증했다.
이렇게 '귀한' CRT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작품을 정비하기도 한다. CRT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트센터가 보유한 다른 CRT로 교체된다. 구소련에서 만들어진 텔레스타 흑백 CRT 모니터와 LED 전구로 만든 '비디오 샹들리에 No.1(1989년)'도 3개월마다 휴식기를 갖는다. 이 기간에 CRT는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다시 정비된다. 이 연구사는 "CRT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백남준아트센터의 최대 과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독일에서 들여온 '촛불 하나(1988년)' 역시 CRT가 핵심이다. 이 작품을 소장한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이 아트센터에 작품을 빌려주기 전 'CRT를 제대로 구비하고 있는지'를 가장 먼저 물어볼 정도다. 촛불을 카메라로 찍은 뒤 여러 대의 CRT 프로젝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벽에 투사한다. 이렇게 하면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촛불의 모습이 다양한 색깔의 2차원 이미지로 전환된다.

레이저, 새로운 매체에 대한 도전

백남준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 불린다. TV와 비디오 작품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는 카세트 테이프, 레코드판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저도 마찬가지다. 당시 레이저는 값이 비싼 탓에 주로 군사용으로 쓰였다. 그랬던 레이저를 예술의 영역으로 갖다놓은 게 바로 백남준이다.
삼원소와 비디오 샹들리에 No 1.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백남준 말년의 역작도 레이저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도전의 결과였다. 레이저와 프리즘으로 '땅, 하늘, 사람'을 형상화한 '삼원소(199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높이 8m의 폭포수 사이로 초록색 레이저광선을 쏜 '야곱의 사다리(2000년)' 등이다.

뉴욕타임즈는 야곱의 사다리의 개막일에 2개면을 털어 "레이저 신작은 작가의 절정기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빛의 속도로 치닫는 세상에서 신기술을 통해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했다는 평가다.

이미 '죽은 기술'이 된 CRT 프로젝터,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레이저를 이번 전시회에서 부활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코로나 3년'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의 감각이 미디어 기술에 종속됐던 기간"이라며 "백남준이 당시 신기술을 통해 예술의 잠재력을 보여줬다면, 이번 전시회에선 거꾸로 옛 기술을 통해 사람의 신체적, 정서적 감각을 일깨우고자 했다"고 말했다.

다다익선·프랙탈 거북선, 관람객 앞으로

1993년 전시된 프랙탈 거북선 원형. 대전시립미술관 제공
다른 미술관들도 백남준의 90번째 생일을 맞아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그의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지난 5년간 기술적 문제로 폐쇄했던 '다다익선(1987년)'을 오는 9월 재가동한다. 다다익선은 1003대의 텔레비전을 쌓아올린 백남준의 최대 규모 작품이다. 대전시립미술관도 오는 10월 개관하는 기획전에서 '프랙탈 거북선(1993년)'의 원형을 복원해 선보인다. 프랙탈 거북선은 1993년 대전엑스포 때 전시된 후 일부가 축소·변경됐다. 미술관은 3개월에 걸쳐 원형을 되살릴 계획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