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편견·외압과 싸웠던 ICT 개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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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봉 스타트업부장1982년 봄 여름 대한민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은 곳곳에서 태동했다. 무엇보다 인터넷이 처음 연결됐다. 그해 5월 서울대 연구실 PC에서 입력된 ‘SNU’라는 문자가 250㎞ 떨어진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PC 모니터에 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개가였다.
경기 부천에선 삼성 반도체연구소가 막 문을 열었다. 삼성이 반도체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윤우(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임성(전 삼성반도체 미주법인장) 김기남(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등 삼성 반도체 1세대가 모여 이듬해 탄생할 64K D램 개발에 착수했다.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도전
통신도 혁신 원년에 돌입했다. 일반 국민에게는 생경한 ‘데이터 통신’ 회사(데이콤)가 처음 설립되고, 전자식교환기(TDX) 개발이 본격 시작됐다.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을 거쳐 2019년 세계 최초 5G로 이어지는 거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지금이야 IT 강국이어서 웬만한 ‘세계 1위’ 타이틀에도 감흥이 없지만, 당시엔 막 후진국 티를 벗은 국가였다. 하나하나가 파격이었다.I(정보)·C(통신)·T(기술)의 씨앗이 40년 전 한꺼번에 움튼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다. 인터넷 혁명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등 학자와 연구자들이 주도했다. 반도체 진출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등 기업인들이, 통신 분야 혁신은 오명 한국뉴욕주립대 명예총장·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당시 정부 관료와 공공기관장들이 이끌었다. 각각 다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담대한 도전이 화학 반응하며 한국 ICT 산업을 일으켰다.
하지만 개척자들이 당시 직면한 현실은 험난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던 전 교수가 1979년 귀국해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하겠다고 하자 관련 부처는 “그걸 어디다 쓰겠느냐”며 지원을 끊었다. 인터넷 연결 성공 이후에도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그는 KAIST로 자리를 옮겼다.1970년대 중반, 이 전 회장이 처음 반도체 진출을 모색했을 때는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모두 반대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지지부진해지자 재계에선 “젊은 2세가 무리한 일을 벌인다”는 눈총이 이어졌다.
후대가 꽃피운 ICT 강국
TDX를 개발할 때도 기존 교환기 업체 등 이익단체와 정치권의 반발이 거셌다. 1970년대 후반 개발을 처음 시도했던 김재익 당시 경제기획원 국장은 뇌물 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양 전 장관 등 당시 실무자들은 “개발에 실패하면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천신만고 끝에 뚫린 혁신의 길은 후대로 이어졌다. 전 교수의 KAIST 연구실에선 김정주(넥슨 창업), 송재경(리니지 개발), 나성균 (네오위즈 창업) 등 IT 거목들이 자라났다. 삼성 반도체 연구소에는 수년 뒤 진대제(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 황창규(전 KT 회장) 등이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반도체 신화를 썼다. 경상현(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TDX 개발진은 10년 후 CDMA 개발을 주도하며 이동통신 강국의 틀을 세웠다.
대한민국 ICT 40년 역사는 눈부셨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 길 맨 앞에 서서 편견과 외압에 맞서고, 각서까지 썼던 개척자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소환하는 것처럼, 뒷세대들이 지금의 누군가를 개척자로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2년 즈음 정부와 재계·학계가 규제를 깨고 기득권과 싸우며 혁신의 새로운 길을 텄다”고 훗날 평가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