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반도체 학과 증원, '과유불급' 경계해야

"공급자 주도의 인력 양성 정책
반도체 생태계 왜곡할 수도
'계약학과' 제도 활용 바람직"

오준병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정부가 10년간 반도체 인력 15만 명을 추가로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조금 걱정되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반도체 인력 15만 명 추가 양성 계획이 작년 문재인 정부가 ‘K반도체 전략’에서 발표한 3만6000명 양성 계획보다 무려 4배 이상 큰 규모라는 점이 걸린다. 두 정부의 반도체산업 육성 전략은 대동소이한데, 인력 양성 목표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이번 정부의 발표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추정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인력 부족분(연간 1500여 명)의 약 10배를 매년 양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 양적인 성과에 매몰돼 막대한 정부 예산을 투입하고도 기업에 필요하지 않은 ‘반도체 낭인’을 양성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현재의 낙후한 대학 현황과 경직된 학사제도를 고려하면 걱정은 조금 더 커진다. 첨단산업 분야에서 기업이 원하는 수준의 인력을 공급하려면 시설과 교수 확보 등에 거액의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학은 최근 10여 년간 동결된 등록금 탓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대학 간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 대부분 대학은 국가가 지속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 첨단산업 분야 학과에 투자하기 어려우며, 교수 인력을 확보한다고 해도 교육 훈련이 부실해질 게 불 보듯 명확하다. 더구나 이번 정부의 학과 증원 정책은 공급 주도 인력 양성 정책에 가깝다. 수요와 공급의 양과 질에서 모두 미스매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 교수는 특정 기업·용도에 필요한 기술교육은 기업이 담당하고, 일반적인 범용 기술은 공공 부문이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학생 입장에서는 특화한 기술을 배울 경우 해당 회사에 취직하지 못하면 헛수고가 된다. 그래서 최근 활발하게 도입되는 것이 ‘계약학과’ 제도다. 계약학과 제도는 대학 정원의 제약을 받지 않고, 기업이 졸업 후 채용을 조건으로 학비 등을 지원해 인력을 양성하는 수요자 중심의 학과제도다. 학생들은 취업이 보장되기 때문에 기업이 요구하는 특화된 교육훈련을 적극적으로 받을 인센티브가 있고, 기업도 원하는 기술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훈련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인력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칭을 줄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정부 정책의 변화에 따른 영향이 작다. 반도체 인력 양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혹자는 계약학과로 인해 대학이 상업화하거나 기업에 종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정규학과와 계약학과의 병행은 기업의 대학에 대한 투자를 늘림으로써 대학과 기업의 ‘이인삼각’을 유도하고, 대학의 기초학문 발달과 수요에 맞는 수준 높은 인력 양성을 모두 촉진할 것이다.따라서 정부는 학과 정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인력 양성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기보다는 현재 일부 유력 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계약학과를 더욱 확산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무엇보다 기업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대학과 교수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기업이 대학이나 교육훈련 기관과 자율적으로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작은 기업 규모로 인해 계약학과 등 인력 양성 프로그램 참여가 어려운 중소기업에는 연합체 구성 등 어려움을 보완할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의 학과 정원 확대 정책은 공급 주도의 인력 양성 정책이라는 점에서 자칫 과도하게 인력을 양성하거나 교육의 수준을 낮추는 등 예산을 낭비하고 산업 생태계를 왜곡할 수도 있다. 당사자인 기업의 수요와 기술 요구 수준을 반영할 수 있는 수요 중심적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확대하길 기대한다. 이것이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기업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인 경제’ 방향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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