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빚 탕감과 모럴 해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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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좌파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 미주리대 명예교수는 부채 문제 연구로 유명한 학자다. 그는 성경의 언어와 예수의 활동을 빚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십계명 중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단순히 성적인 관점이 아니라, ‘대출 시 담보로 잡았던 채무자의 아내와 딸을 채무 불이행 시 성 노예로 강요하는 행위’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죄 사함’은 곧 ‘빚 탕감’을 의미하는 것이며, 바리새인들과 같은 채권자들에게 너무 위협적인 존재였던 탓에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뒤 그 이듬해를 희년(禧年), 주빌리(jubilee)로 삼았다. 50년마다인 희년에는 돈이 없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을 조건 없이 풀어주는 등 모든 빚을 탕감해줬다는 얘기가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 전한다. 이런 전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론의 금융 서판을 깨끗이 지우는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라는 부채 기록 말소 의식을 정기적으로 행했다. 국민이 채무자로 속박당하면 전쟁 가용 병력이 그만큼 줄어드는 부작용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했다.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5년마다 ‘부채 희년’이 반복되고 있다. 정권 초기마다 금융 취약계층의 고통 완화 차원에서 부채 감면 정책이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농가부채 경감, 신용카드 빚 감면, 다중 채무자와 기초생활수급자 금융 지원 등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장기 소액 연체자 60여만 명에 대해 채무 전액을 탕감해 모럴 해저드 논란이 크게 일었다. 고대 사회에서 부채 탕감이 병력 확보 취지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득표라는 정치적 셈법이 작용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소상공인·자영업자 새출발기금’을 내세우고 있다. 이번에도 대상자 선정과 경감 방식을 놓고 논란이 적지 않다. 성실히 채무를 갚아온 대다수 채무자와의 형평성 및 모럴 해저드 시비 또한 판박이다. 탕감 정책이 있는 한, 영원히 지속될 논란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종교에서는 추앙받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나쁜 경제학자일 수 있다.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 결국 일자리 정책이 취약 계층을 위한 최고의 금융 프로그램 아니겠는가.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뒤 그 이듬해를 희년(禧年), 주빌리(jubilee)로 삼았다. 50년마다인 희년에는 돈이 없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을 조건 없이 풀어주는 등 모든 빚을 탕감해줬다는 얘기가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 전한다. 이런 전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론의 금융 서판을 깨끗이 지우는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라는 부채 기록 말소 의식을 정기적으로 행했다. 국민이 채무자로 속박당하면 전쟁 가용 병력이 그만큼 줄어드는 부작용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했다.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5년마다 ‘부채 희년’이 반복되고 있다. 정권 초기마다 금융 취약계층의 고통 완화 차원에서 부채 감면 정책이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농가부채 경감, 신용카드 빚 감면, 다중 채무자와 기초생활수급자 금융 지원 등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장기 소액 연체자 60여만 명에 대해 채무 전액을 탕감해 모럴 해저드 논란이 크게 일었다. 고대 사회에서 부채 탕감이 병력 확보 취지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득표라는 정치적 셈법이 작용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소상공인·자영업자 새출발기금’을 내세우고 있다. 이번에도 대상자 선정과 경감 방식을 놓고 논란이 적지 않다. 성실히 채무를 갚아온 대다수 채무자와의 형평성 및 모럴 해저드 시비 또한 판박이다. 탕감 정책이 있는 한, 영원히 지속될 논란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종교에서는 추앙받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나쁜 경제학자일 수 있다.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 결국 일자리 정책이 취약 계층을 위한 최고의 금융 프로그램 아니겠는가.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