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소련에 맞서 손잡았던 美·中은 왜 '패권 다툼'에 나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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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게임2009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11차 중국 외교사절 회의’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무대에 올라 수백 명의 외교관과 외교정책 관리들을 앞에 두고 연설했다. 그는 “국제적 세력 균형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며 “다극화 전망이 훨씬 분명해졌다”고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의 힘이 약해진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이어 그는 “능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기(도광양회·韜光養晦)를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달성하기(유소작위·有所作爲)로 수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러쉬 도시 지음
박민희·황준범 옮김
생각의힘 / 632쪽|2만7000원
바이든 정부 국장이 본 '중국의 대전략'
'톈안먼·걸프전·소련붕괴' 3대 사건으로
中, 민주주의와 美 군사적 위협 깨달아
1989~2008년 '천천히 미국 힘빼는 시기'
2009~2016년 '서구 쇠퇴 기다리는 시기'
2017년 이후 '미국과 맞서는 시기'
1989년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를 언급한 이후 20년간 지켜온 중국 외교 전략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출신의 중국 전문가이자 현재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중국 담당 국장으로 일하는 러쉬 도시가 쓴 <롱 게임>은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의 두 번째 ‘대(大)전략 시기’가 시작됐다고 진단한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출간된 뒤 현지에서 화제를 모은 책이다.책은 냉전이 끝난 후 중국이 처음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금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국식 질서를 대체하려는 대전략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왔다고 주장한다. 첫 단계는 1989년부터 2008년까지의 ‘도광양회’ 시기다. 미국의 힘이 중국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미국의 힘을 빼놓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전까지 미국과 중국은 준동맹에 가까웠다. 공동의 적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러다 중국에 트라우마가 된 3대 사건이 벌어졌다. 1989년의 톈안먼 사태, 1990~1991년의 걸프전쟁, 1991년의 소련 붕괴다. 톈안먼 사태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걸프전쟁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일깨웠다. 소련의 붕괴는 미국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다는 걸 뜻했다. 1993년 장쩌민 주석의 “미국의 정책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중국의 통일과 발전, 강해짐을 원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확연히 달라진 중국 내 분위기를 반영했다.도광양회 기간 중국은 비싼 데다 미국의 경계심만 자극할 항공모함 대신 중국 근해에서 미군을 물리칠 수 있는 잠수함과 기뢰, 대함 미사일에 집중 투자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조력자로 나섰다. 다자주의를 내세워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면서, 이웃 나라들에 ‘중국은 위협이 아니다’며 안심시키려고 했다. 책은 중국이 2001년 최혜국대우(MFN) 지위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것도 대전략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미국은 17년 뒤 도널드 트럼프가 중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중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할 수단을 잃고 말았다.
두 번째 시기는 2009~2016년이다.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서구세력이 확연하게 쇠퇴하고 있다고 봤다. 자체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남중국해 섬들을 군사화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출범시켰고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이 담당한다’는 구호 아래 이전에는 모호했던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를 강화했다. 일대일로(一一路) 정책을 통해 이웃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세 번째 시기는 2017년 시작됐다. 그해 10월 18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3시간30분에 걸쳐 3만 단어에 이르는 연설을 통해 ‘신시대’를 선언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2049년까지 미국을 넘어서는 세계 초강대국이 될 거라고 공언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등을 보면서 서구의 쇠퇴가 더 확연해졌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은 미국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인권을 무시하면서 자국 내 반발 세력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적극적으로 해외에 군사기지를 짓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생명공학 등 미래 기술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중이다.책은 중국의 계획대로 된 2049년의 세상을 이렇게 그린다. 한국과 일본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중국은 대만을 흡수 통일한다. 아시아는 중국의 강압적인 영향권 안에 들고, 지역 전체가 비자유적으로 변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미래를 막을 수 있을까. 단기 해결책은 없다. 저자는 미국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과 직접 대립하기보다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주도 질서에 불만을 가진 나라들에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저자는 말미에 낙관론을 내세운다. 미국 쇠퇴론은 1930년대 대공황 때도 나온 얘기라는 것이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이며, 미국이 다시 힘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책에 한가득 써놓은 우울한 전망을 뒤집기엔 역부족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