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기와지붕, 녹슨 대문….
한지 찢어붙여 표현한 달동네 판자촌
5월 아트바젤 홍콩서 완판되고 RM도 소장
"외환위기 때 경제적 어려움 처했던 나와 닮아"
달동네 그림은 '치유의 과정'…왜 사냐는 물음에 답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약 20년 전 정영주 작가가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1997년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옮겨 작품활동을 하던 정 작가는 1998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작가로서 미처 자리잡지 못한 시점에 '울며 겨자먹기'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이후 10년간 고난은 계속됐다. 그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지인들은 떠나가고, 돈마저 떨어졌다. "살아서 뭐하나"라는 물음이 자연스레떠올랐다.
정 작가의 눈에 낡고 초라한 달동네가 들어온 게 그 무렵이었다. 드문드문 이가 빠진 기와지붕, 금 간 시멘트 벽, 녹슨 대문….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은 도시의 화려한 빌딩과 비교돼 마치 작가 자신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적 부산 달동네에서 살았던 정 작가에게 이 곳은 고향과도 같았다. 초라하지만 가족의 온기와 고향의 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가 캔버스에 달동네를 담기로 결심한 배경이다.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정 작가의 개인전은 이같은 달동네 그림 28점으로 가득 차있었다. 정 작가는 요즘 미술시장에서 '핫한' 작가다. 2020년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정 작가의 작품을 구매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모았다.지난 5월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홍콩 아트바젤에선 출품작이 '완판(완전판매)'됐다. 이번에도 전시회가 열리기 전부터 개인에게 판매하지 않는 1점을 빼고 모든 작품이 판매됐다.
Another World.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이번 개인전 이름이기도 한 '어나더월드(Another World)'다. 200호(가로 259㎝, 세로 194㎝) 초대형 캔버스에 달동네 모습을 담았다. 시간적 배경은 밤이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판잣집 사이로 골목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있다. 서로 기대며 의지하고 있는 판잣집, 따뜻한 주황빛의 가로등 덕분에 달동네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감싸 안아주는 보금자리로 묘사된다.이 달동네는 상상 속 공간이다. 작가가 유년기에 살던 부산, 서울 신림동·봉천동 등을 참고했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상상해서 그렸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 속 달동네에 자신이 살던 곳을 투영할 수 있다.
눈 내린 저녁.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캔버스 위에 한지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종이를 찢어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을 사용했다. 밑그림에 맞게 한지를 오려내서 꽉 구긴 후 다시 펴서 캔버스에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덧대는 방식이다.
정 작가는 "종이 조각 하나하나를 붙여서 집을 만들고 마을을 이루는 것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며 "과거 추억을 담은 기억의 조각이 모여서 지금의 '나'라는 세계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작품 이름이 '또 다른 세계'를 뜻하는 어나더월드인 이유다.시간의 흐름을 새겨넣은 작품도 있다. 지붕에 하얀 눈이 소복히 쌓인 '눈 내린 저녁',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 아래 고요한 달동네를 그린 '새벽' 등이 그렇다.
새벽 827.정 작가에게 달동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곧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초라함을 내면에 담아두지 않고, 작품으로 그려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