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경기침체 논쟁, 한국은 자유롭나
입력
수정
지면A30
정인설 워싱턴 특파원지난달 27일 미국 중앙은행(Fed) 별관. 7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후 제롬 파월 Fed 의장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브리핑룸을 가득 메운 50여 명 기자들의 질문은 미국의 경기침체 여부에 집중됐다.
파월 의장은 질문이 나올 때마다 “미국은 경기둔화(slowdown)를 겪을 순 있어도 절대 경기침체(recession)에 빠지진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경기침체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파월 의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Fed는 경기침체 정의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며 즉답을 피했다. 현 상황은 경기침체가 아니라고 자신하면서도 경기침체 정의는 Fed의 업무가 아니라고 발뺌했다.
모호한 경기침체 정의
파월 의장의 말대로 미국의 경기침체 결정은 Fed가 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의 연구 모임인 미국경제학회(NBER)가 한다. 구체적으로는 NBER 산하의 ‘경기사이클 판정위원회(BCDC)’가 한다.문제는 그 정의가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BCDC는 ‘경제 활동의 현저한 감소가 경제 전반에 확산하고 몇 달간 지속할 때’로 경기침체를 정의한다. 두 분기 연속 국내총생산(GDP) 감소 등 구체적으로 침체 조건을 정한 영국과 다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NBER은 민간기구라서 회의 일정과 결과를 공표할 의무가 없다. 8명의 저명한 경제학자로 구성됐다지만 인선 원칙과 과정은 비공개다. CNN비즈니스가 “들어본 적도 없는 경제학자들이 경기침체 결정을 한다”고 비판한 이유다.결정도 신속하지 않다. BCDC가 경기침체 여부를 결정할 때 GDP 외에 고용과 가계소득, 산업생산 등 8개 경제지표를 참조한다.
통계치가 수정될 때가 많아 속도를 내기 힘들다. 이 때문에 경기 침체가 시작된 뒤 반년이 지나 침체 판단을 내리는 게 다반사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1년 뒤 경기 침체라고 판단했다. 2020년 2월 코로나19 위기 당시 넉 달 만에 경기침체 판단을 내린 건 예외적이었다.
엇갈리는 지표
경기가 급격히 꺾인 코로나19 때와 달리 지금은 엇갈린 지표들이 나오고 있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GDP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의 올 2분기 GDP는 전 분기 대비 0.9%(연율 기준) 감소했다. 1분기(-1.6%)에 이어 두 분기 연속 GDP가 감소해 ‘기술적 경기침체’ 조건을 충족했다.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경기침체는 광범위한 경제 약화를 의미하는데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며 강력한 노동시장을 예로 들었다. 많은 기업이 감원에 나서겠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지표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매달 일자리가 40만 개 이상 생겨나고 실업률은 50년 내 최저 수준인 3.6%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는 “경기침체나 실업률 급등 없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자신한다.하지만 재무장관 출신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대다수 투자은행(IB)도 미국 경제가 올해 말이나 내년 침체에 빠질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경기침체 논란을 ‘남의 일’로만 볼 수 있을까.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14년 만에 4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이 소식이 미국의 두 분기 연속 GDP 감소 뉴스보다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