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출신이 도대체 왜? 결혼식 전날도 새벽까지 야근" [권용훈의 직업 불만족(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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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광고기획자(AE)의 현실
현업서 AE란 ‘Aㅏ.. E것도 제가 하나요?’로 불려
광고 기획 외 잡업무 많아 '테란 일꾼' 된 기분
연봉 대략 5000만원, 한달 200시간 일하기도
야근 예측 불가 … 기상청 컴퓨터도 못맞출 것
지난 1일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통해 국내 3대 광고회사 직원을 만났다.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다는 그는 화상회의가 더 익숙한 듯 업무에 대한 불만을 털어냈다.▷짧게 자기소개 하자면.
삼성, LG, 현대차가 운영하는 국내 3대 광고대행사 중 한곳에 다니는 저연차 광고기획자(AE)입니다. 국내외 주요 대기업들의 광고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광고업계 입사를 꿈꿨나요.
어릴 때부터 TV 광고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CM송도 따라 부르고 자연스럽게 광고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죠. 대학교에서도 광고를 공부한 전형적인 광고 꿈나무라고 생각합니다.▷광고대행 업무 만족하시는지.
막상 업계에 뛰어드니 일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업무 범위도 넓고, 야근도 잦고, 광고주한테 막말도 들어야 하고(강조)... 방금 잠깐 상상만 했는데도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드네요.
▷불만족하는 이유는.
업무가 너무 많고 광범위해요. 스타크래프트 게임으로 따지면 테란 일꾼이 된 기분이에요. 잡다한 업무를 전부 다 맡깁니다. 현업에서는 AE가 ‘Aㅏ.. E것도 제가 하나요?’의 준말이라고 불러요. 광고기획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로 광고를 기획하는 업무는 10%도 안돼요. 보통은 광고주의 무수한 연락을 받으며 요청사항을 쳐내는 데 바쁘죠.
▷요즘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보통은 10시에 출근해서 7시쯤에 퇴근합니다. 사실 유연 근무제에 재택근무도 보장되어서 언제 나와도 상관없고 집에서 일해도 괜찮아요. 보통 언제 집에 갈지는 예측불가에요. 기상청 슈퍼 컴퓨터로 분석해도 못맞출걸요?(웃음) 재택근무 해도 되냐고 팀에 허락을 구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요즘 새로운 광고 캠페인 아이디어를 짜고 있는데요. 이건 집에서 혼자 생각해야 하는 거라 업무 시간에 포함이 안 되네요.▷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광고회사의 생태는 광고주로부터 특정 기간의 광고 캠페인을 입찰 형식(흔히 말하는 경쟁PT)으로 받아오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주에 성공한 광고를 실제로 만들고 운영하죠. 기획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며 최전선에서 광고주, 협력사, 그리고 회사 내부 유관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그래서 말은 광고기획자이지만 실제 업무는 연락 및 운영 업무가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업무 강도가 많이 높나요.
업무량이 많은 건 둘째치고 광고주의 별의별 요구를 다 받아주다 보면 '내가 이러려고 취업했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는 선배는 결혼식 전날까지도 새벽까지 야근했는데 너무 현타가 왔대요. 울적한 마음에 울고 싶었다는데 다음날 눈이 부을까봐 꾹 참고 일했다네요. 그리고 광고를 기획하면 보통 아이디어를 구상할 시간이 하루 이틀밖에 없어서 짧은 시간에 머리를 쥐어짜야할 일도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면 정말 정신이 없는데 회복할 시간도 없이 또 다른 일이 휘몰아칩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한달에 몇시간 정도 일하나요.
업무가 많은 기간에는 200시간을 훌쩍 넘기죠. 오죽하면 회사 인트라넷에 출퇴근 등록을 하려고 해도 근무 가능 시간을 초과했다면서 기입이 안될때가 많아요. 그럼 제 노동은 무료 봉사죠. 아이디어 발상도 해야 하는데 이건 근무 시간에 포함이 안 되니까 자연스럽게 집에서 ‘시간 외 근무’를 하게 되네요. 회사에서 퇴근했다고 하더라도 자는 순간까지 기획안을 생각해야 하거든요. 아 혹시라도 광고주가 야간에 연락하면 응대도 해야 하고요. 출퇴근이 없어요. 몸은 집에 있어도 머리는 항상 출근중입니다(하하..)▷연봉은 어느 정도 되나요.
5000만원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 연봉 수준은 문과 대기업 평균은 되는 거 같습니다. 복지 수준도 준수하고요. 하지만 많은 광고회사들은 업무 범위와 노동 강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대우를 받고 있어요. 광고회사의 대부분은 포괄임금제로 근로 계약을 맺기 때문에 야근을 많이 한다고 돈을 더 많이 주지도 않습니다.
▷저녁 약속 잡기도 어렵겠네요.
업무의 가장 힘든 부분이 야근을 언제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집 가려고 짐 싸는데 광고주가 연락 와서 ‘내일 오전까지 자료 준비해달라’고 할 때도 있고요, 갑자기 회의가 잡혀서 저녁 약속이 취소되고 예약금까지 날리는 경우도 너무 흔합니다.
▷회식이나 점심 술자리가 많다고 들었는데.
회식은 팀에 따라 다른데요, 특이하게 낮 술자리가 꽤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가봤어요. 근데 광고주나 유관부서는 일하는 시간이니까 제가 술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일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노트북을 들고 식당에 갑니다. 연차가 차면 찰수록 낮 술자리에 컴퓨터 없이 휴대폰만 들고 가거나 아예 빈손으로 가시더라고요.▷이직할 생각이 있으신지.
무조건 할 겁니다. 부모님이 말려도 때려치울 겁니다. 아직은 이직 제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죠...
▷어디로 이직하고 싶나요.
당연히 갑질하는 '광고주' 회사로 가고 싶습니다. 제가 광고주가 되면 이런 비정상적인 업무 문화를 바꾸고 싶어요. 서로 계약관계이긴 하지만 다 행복하게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업계 취업 경쟁률이 높은 편으로 알고 있는데.
학벌은 크게 보지 않습니다. SKY 출신이 광고회사에 오면 "도대체 왜?" 라고 하는 분위기가 있긴 합니다(웃음). 대신 광고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지를 봅니다. 아무래도 인턴 경험은 필수인 것 같고요. 이름 있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친구들도 많아요. 게다가 중고 신입도 꽤 있습니다.
▷입사 전형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먼저 서류 전형이 있고요, 인적성 필기시험 혹은 AI 역량검사를 진행하고 그다음 심층 면접을 보고 인턴으로 채용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몇 주 동안 현업과 발표 과제 등을 거쳐 선발된 인원은 정직원이 되죠. 회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큰 광고회사는 바로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전환형 인턴으로 인력을 선발하는 추세입니다. 드라마 <미생>을 떠올려보시면 되겠네요. 인턴까지 가게 되면 광고 쪽으로 스펙이 끝판왕인 사람들이 엄선되기에 매사에 긴장감이 넘칩니다. 그래서 누가 붙고 누가 떨어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가장 퇴사하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인지.
광고주에게 막말 듣는 순간이요. 본인 성에 차지 않는다고 폭언을 하는데 감정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죠. 그러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요. 하루는 몸이 너무 안좋아서 연차를 썼는데요, 연차라고 알려줘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합니다. 그러면 가슴 한켠에 품은 퇴사 봉투를 꺼내고 싶어지는 순간이 와요. 광고회사는 광고주의 ‘광고 업무를 대행’을 하는 게 원칙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광고주가 직접하기 귀찮은 일이나 비용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도 광고회사가 대신해주게 되는데요. 이런 소위 말하는 ‘짜치는 일’을 광고주가 시키는데 그걸 또 회사 내부에서는 ‘해달라고 하면 해줘야지 어떡하겠냐’라고 하면 정말 그만두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광고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이른바 ‘스타 광고인’이 있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에도 그런 분이 몇 있는데요. 입사 전에는 ‘저 사람들은 뭘 먹고 살길래 저런 광고를 만들까?’하고 궁금했는데 지금 보니 저랑 똑같이 밥도 먹고, 엘리베이터도 타고, 화장실도 가고, 술도 마시더라고요.
▷광고 회사 근무 장단점을 꼽자면.
일단 연예인을 많이 봅니다. 촬영하다 보면 정말 바로 옆에서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연예인 관련 소소한 가십들도 알 수 있다는 거?(웃음) 기업 정보도 면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회사를 알아야 광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업체 미팅이나 보고에 참석하면 임원이나 대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도 기업도 세간에 알려진 평판과 실제 모습은 꽤 다르더라고요.#직업 불만족(族) 편집자주
꿈의 직장 '네카라쿠배'에서도 매년 이직자들이 쏟아집니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이 이직을 염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大 이직 시대'입니다. [직업 불만족(族)]은 최대한 많은 직업 이야기를 다소 주관적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게 담아내고자 합니다. 이색 직장과 만족하는 직업도 끄집어낼 예정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직장 생활하는 그날까지 연재합니다. 아래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직접 보고 들은 현직자 이야기를 생생히 전해드리겠습니다. 많은 인터뷰 요청·제보 바랍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사진=게티이미지뱅크